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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도빌/20150529-20150530] 다 잊어버리고 싶었던 날 (1)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노르망디이다. 프로방스나 랑그도끄처럼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해안은 아니지만, 차갑고 거친 것 같은 모습 뒤에 숨겨진 우아함과 정갈함이 매력적인 바다이다. 그 중에서도 도빌은 인근의 옹플뢰르, 에트르타와 함께 ‘노르망디의 3대 보석’이라고 일컬어지는 휴양 도시이다. 파리와 가까운지라 파리지앵들이 가장 선호하는 바닷가 도시이기도 한데, 특히 영화제와 승마가 유명한 고급 휴양지이다.


 파리를 떠나 도빌로 향할 때 나는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물론 2월 달에 프랑크푸르트와 암스테르담으로 떠날 때의 나도 학기 말 슬럼프에 허덕이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피곤함과 어지러움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2월 달의 내가 적응기를 겨우 넘긴 상태에서 오는 정체기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면, 도빌로 떠나기 직전의 나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한계에 부딪쳐서 오는 자괴감에 침몰되고 있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결국 여행이었다. 단, 박물관과 건축, 유적 등을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겸하던 여태까지의 여행과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다 오는 휴양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온전하게 몸을 풀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머리를 비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파리 생라자르역에서 노르망디로 향하는 기차를 탈 때면 뭔가 오묘한 느낌이 든다. 북적거리는 도시를 벗어나 촉촉하게 젖어있는 숲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런 느낌을 준다. 똑같은 녹지에 평원이라고는 해도, 샹파뉴나 로아르, 알자스, 혹은 남쪽으로 펼쳐진 평원들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차창 밖의 풍경은 언제나 미묘한 감촉을 선사한다. 마치 시각이 촉촉한 촉각으로 환원되어서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다른 프랑스의 평원들이 보다 따뜻하고 풍요롭고 기름진 느낌이라면, 노르망디는 조금 더 우중충하고 젖어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다.






 상념에 빠져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 있을 때에는 이미 종착지인 도빌-트루빌 역에 기차가 도착해 있었다. 무거운 눈을 비비고 기차에서 내리자 회색의 우중충한 하늘이 나를 반겨주었다.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가득 차 있었고 쌀쌀하게 바람이 불고 있었다. 무거운 구름이 가득 낀 하늘에선 당장 빗방울이 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휴가를 온 것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날씨는 별로였지만 도빌은 아름다운 도시이다. 회색빛이 도시가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을 다 가릴 지라도, 바다에 접하고 있는 작고 아담한 보석 같은 매력은 오히려 우중충함 속에 더욱 빛나는 역설적인 미학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5월 말이지만 날씨는 쌀쌀하다 못해 싸늘했다. 옷을 얇게 입고 간 것이 매우 후회가 되어서 도착하자마자 약 2시간 정도는 그냥 호텔에서 뒹굴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왕 도빌에 왔는데 바다를 보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결국 몸을 일으켜 지도를 들고 바다로 향했다. 호텔에서 해변으로 가기 위해서는 도빌 시내를 지나가는데, 좁고 뾰족한 지붕들이 서로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마왕의 저주에 걸려서 갇혀있는 옛날 마을의 모습을 연상시켜서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여유로운 분위기와 바다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휴양지라고 들었는데, 역시 날씨가 안 좋으면 그런 것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나 바다를 보고 싶었고, 결국 고집대로 해변가로 갔다.









 해변은 오히려 시내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물론 어디가 구름이고 어디가 바다인 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뿌연 회색만이 우중충하게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고,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바다는 무거운 구름의 물이 들은 듯 어둡게 가라앉은 채 흔들리면서 파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모래는 살짝 따가웠다. 폭풍에 가까운 비바람에 흔들리는 바닷물이 해안가를 밀고 들어와 발바닥을 적셨다. 북쪽이라 그런 지 파리보다 훨씬 추웠고, 물은 얼음장만큼이나 차가웠다. 하지만 바다를 봤다는 성취감은 꽤 컸다. 마치 쓰기 싫은 보고서를 다 쓰고 커다란 쾌감을 느꼈을 때처럼, 험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해변을 걷고 바다를 봤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는 정말 기뻤다. 비바람이 휘몰아쳐 몸을 적시고 머리칼을 다 엉망으로 헤집어 놓아도, 그냥 바다에 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바다를 직접 보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한참을 해변에서 멍하니 있다가 빗방울이 거세지자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호텔로 돌아왔다. 몸이 차게 식어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잘 안 풀리는 일들도, 안 써지는 논문도, 바다와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펑 뚫리면서 저 멀리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상태로 호텔의 커다란 욕조에 몸을 푹 담근 채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붙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