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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토리노/20150604-20150607] 태양이 만들어내는 미적 감각에 대한 첫인상

 나에게 있어서 이탈리아는 라면의 건더기 스프 같은 존재이다. 직접적으로 이탈리아를 연구하는 전공자는 아니지만, 이탈리아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연구는 진척되지 않는다. 마침 하던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던 지라 결국 이탈리아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일이 수틀리거나 기분이 안 좋아지면 여행을 떠나는 습관이 생겨버린지라 딱히 새로운 것은 없었다. 혹자는 이것도 일종의 병이라고는 하지만, 어쨌건 여행이라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멋진 존재이다. 하물며 책에서 본 도시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결국 기차표를 결제했다.


 본래 여행의 목적지는 토리노, 더불어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토리노 주변 지역이나 친구가 살고 있는 제노바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기차로 이탈리아를 가는 경우 선택의 폭은 의외로 많지가 않다. 토리노와 밀라노 두 도시 뿐이다. 하지만 밀라노는 상업도시인지라 북적북적 한데다가 일기예보를 보니 기온이 36도로 치솟는다고 해서 결국 택한 곳이 토리노이다. 토리노에선 제노바와 리구리아 지방, 아오스타 계곡 등으로 가기도 쉬운데다가, 전부터 ‘사보이의 귀부인’ 혹은 ‘북부 이탈리아의 파리’라는 토리노의 명성을 들어왔던 지라 선택에 망설임은 없었다. 한창 논문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받았어도 논문을 다 쓰면 이탈리아를 갈 수 있다는 희망하나로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논문을 제출한 후 파리 리옹 역으로 가서 이탈리아로 가는 아침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멀다. 기본이 6시간에서 7시간 정도. 독일은 뮌헨을 제외하고는 여태까지 방문한 대부분의 도시가 파리에서 열차로 3시간에서 4시간 내외의 거리에 위치한 지라 ‘멀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파리에서 남프랑스까지도 4시간 안에 갈수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정말로 멀다. 북부에 치우친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시작해서 넓은 육각형 모양의 프랑스 영토를 가로질러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행기보다는 기차여행을 더 좋아한다. 비행기에 비해 덜 번거로운 탑승절차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구경 때문이다. 6시 30분에 출발하는 열차 안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피곤에 가득 절어서 결국 잠에 빠져버리는 승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남아있던 할 일 때문에 전날 잠을 설쳤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녹색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눈 붙일 틈을 놓쳐버렸다.


 프랑스는 거대한 평원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영토의 모양 때문에 육각형이라고 지칭되기도 하지만, 그 육각형의 대부분이 비옥한 농토이기 때문에 ‘서유럽의 빵바구니’ 라고도 불린다. 유럽의 서쪽엔 프랑스, 동쪽엔 우크라이나라고 하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실제로 기차를 타고 프랑스 내를 이동할 때에는 거의 산을 보지 못했다. 파리에서 가장 높다고 하는 몽마르트도, 언덕과 구릉이 울퉁불퉁하고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 국가 출신인 내게는 별 감흥이 없다. 노르망디를 가던, 알자스나 샹파뉴를 가던, 남쪽의 몽펠리에를 가던, 넓게 펼쳐지는 녹색 평원과 농토의 모습이 새로워서 연신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다르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단잠에 빠졌다가 눈을 뜬 순간, 한국에서 보았던 거대한 산들이 시야를 꽉 채우고 있었다. 모단(Modane)이라는 국경도시였는데, 이곳에서부터는 거대한 산맥이 시작된다. 그리고 국경도시를 지나자마자 토리토 포르타 수사(Torino Porta Susa) 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프랑스를 출발할 때는 바람이 살짝 불어 쌀쌀했던 지라 긴 원피스에 가죽 자켓을 걸쳤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방 속에 자켓을 구겨 넣었다. 핸드폰을 꺼내 날씨를 확인하니 기온이 30도라는 메시지가 떴다. 말 그대로, 뜨겁게 이글거리는 태양이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이 내리쬐고 있었다. 일단 캐리어를 이끌고 역 근처의 관광안내소로 가서 도시 지도를 얻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길을 걷다가, 문득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피자리아의 테라스 석에 털썩 앉았다. 역시 이탈리아에 왔다면 피자와 파스타를 먹어주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늘에 걸터앉았다. 태양은 뜨거웠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서 그런지 그늘에 들어가니까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가씨, 뭘 원하시나요? 주문하시게요?”


 알록달록한 색깔의 티셔츠와 편안한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 와서 말을 걸었다. 이미 먹고 싶었던 메뉴가 있었기에 그것으로 주문을 하자 그가 손뼉을 탁 튕기며 탁월한 선택이라는 단어를 던졌다. 전체적으로 들뜨고 가벼운 듯한 분위기, 그 순간 나는 내가 정말로 이탈리아에 왔음을 느꼈다. 물론 뜨거운 태양의 환영을 받을 때에도 ‘이탈리아’라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역에 나와서 보이는 토리노의 전경은 내가 생각하던 편견 속의 이탈리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얼핏 보기엔 현대적이지만 우아하고 고고한 티가 나는 피에몬테의 귀족, 흔히 생각하는 어지럽고 더러운 이탈리아의 모습보다는 잘 정돈된 파리 같은 느낌이 강한 도시였다. 그러나 사람은 속이지 못한다. 아무리 우아한 도시라도, 도도하고 근엄하게 자세를 빼는 프랑스의 종업원들과는 달리 이들은 캐주얼한 차림으로 말을 걸고 농담과 웃음을 터뜨린다. 왜냐면 그것이 곧 ‘지중해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맛본 피자는 아주 맛있었다. 너무 느끼하거나 뻑뻑하지도 않고, 너무 무겁지도 않게 위장을 달래주는 식사였다. 크게 만족하고 바로 호텔로 들어갔다. 체크인을 하고 곧장 나와서 시내를 구경하려고 했지만, 이미 더위에 지친 몸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잠깐 눈을 붙인 후 짧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토리노는 생각보다 아주 깔끔하고 잘 정리된 도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뉴욕처럼 마냥 현대적이기만 한 도시는 아니다. 오히려, 잘 세공된 보석 같기에 고전적인 도시이다.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사보이 왕가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수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도시 전체에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독특한 기품이 배어있다. 현대적이고 깔끔한 느낌이 주는 외양이지만, 한편으로는 고풍스럽고 역사적인 옛 흔적이 가득한 거리가 남아있다. 그리고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산맥들은 여름의 기운을 머금어 잔뜩 싱그러워진 녹색으로 부드러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작열하는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 때문에 상당히 더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조건물과 산으로 인해 그늘에서만큼은 쾌적했다.








 유럽은 여름에 해가 상당히 길기 때문에 저녁도 환하다. 하지만 저녁이 환하다고 해서 모든 장소가 늦게까지 문을 여는 것은 아니다. 토리노의 심장인 사보이 궁전 앞의 광장은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활기찼지만,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박물관과 궁전 문이 닫혀있었다. 그래서 대충 광장을 둘러본 후, 영화박물관으로 쓰이는 ‘몰레 안토넬리아나’라는 건물로 갔다. 토리노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지닌 이 건물은, 고전적인 첨탑식의 모양에 현대적인 디자인과 재질이 조화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토리노 스카이라인에서 단연 돋보이는 이 피조물은 파리의 에펠탑, 쾰른의 대성당, 프랑크푸르트의 고층건물과 마찬가지로 도시를 대표함과 동시에 도시가 낯선 여행자들에게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본래 유대교 회당으로 계획된 이 건물은 유대인과 현지인들의 갈등으로 인해 중간에 건축이 중단되기도 하는 등의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탈리아 통일 이후 사보이의 왕이자 피에몬테의 군주였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게 헌납된 후 국립영화박물관 겸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주조되는 2유로자리 동전의 뒷면과 토리노 동계 올림픽의 엠블럼에 부조된 건축물이 바로 이것이다. 토리노를 넘어 피에몬테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상징물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입구에서 전망대로 가는 표를 산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쭈욱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투명한 유리 너머를 통해 이탈리아 영화의 역사를 살짝 훔쳐보려는 순간, 시야가 확 트이면서 토리노의 풍경을 파노라마로 만나게 된다. 높은 곳에서 보는 토리노는 색다르다. 마치 파리의 좁은 골목을 돌아다닐 때와 전망대에서 에펠탑과 각종 기념물들을 보는 것이 전혀 다른 느낌을 주듯, 걸어 다니면서 보는 토리노와 전망대에서 보는 토리노는 매우 다르다. 북부 이탈리아의 파리, 혹은 피에몬테의 귀족이라는 명성이 헛되지 않게 단조로운 것 같으면서 우아함과 기품이 배어나오는 거리가 토리노의 도보 풍경을 대변하는 말이라면, 전망대에서 본 토리노는 ‘제대로 세공된 보석’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모든 건물들이 작아지면서 한 손에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은 어쩐지 내가 도시를 창조한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우쭐하게 되기도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멋진 산과 그 위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장엄한 수페르가 대성당을 보는 순간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자세가 된다.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거만한 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연과 문명에 대한 경외심을 배워가는 과정인 것 같다. 태양은 뜨겁고 햇살은 눈이 부셨지만, 높은 곳인지라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땀을 쓸어갔고 전망대에서 둘러본 도시는 고전적인 미와 귀족적인 우아함, 그리고 현대적인 세련됨이 조화된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넋을 잃고 있다가 슬슬 해가 지고 그늘이 드리워질 때 즈음 전망대를 내려와 본격적으로 토리노와의 첫날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