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셀의 공중정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다음 날 내가 향한 곳은 풀다 였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시의 이름은 북부 헤센을 휘감는 풀다 강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카셀이나 마부르크 같은 도시들에 비해 인구나 규모 면에서 뒤지는 감이 있지만 북부 헤센에서는 가장 유서 깊은 도시이다. 744년, 성 보니파키우스의 제자 슈투르미우스에 의해 베네딕트회 수도원이 건립되면서 본격적으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된다. 풀다 수도원은 단순히 종교인들의 공동 생활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풀다 지역의 종교 공동체라는 의미를 넘어, 중부 독일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수운 교통의 요지에 사람이 모여들게 한 원동력이었다. 더불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임명권을 가지는 마인츠 대주교를 5명이나 배출한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수많은 고전을 필사하고 연구한 학문의 중심지였다. 이 수도원 덕분에 풀다는 상업의 요지가 되어 오랫동안 학문적 명성과 부를 누리며 발전할 수 있었다. 현재 풀다 수도원의 원형은 파괴되었지만, 그 일부가 재건되어 대성당 옆의 시립 도서관 겸 문서보관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카셀에서와 달리 풀다에선 날씨가 매우 좋았다. 악명 높은 독일의 겨울 날씨이지만 풀다에서는 맑고 햇볕이 드는 날씨가 들었다.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들어오는 직선의 거리와 아기자기한 건물들은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부서지는 햇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카셀이 우중충한 회색의 현대도시와 우중충한 동화속의 숲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도시였다면, 풀다는 그보다는 좀 더 규모가 작지만 더 다양한 색깔로 장식된 아기자기한 도시이다. 카셀, 프랑크푸르트, 다름슈타트 같은 도시들과는 달리 운 좋게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풀다는 중세보단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더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끌며 학문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번영의 절정을 달리던 도시를 휩쓴 가장 큰 화마는 다름 아닌 30년 전쟁이었다. 헤센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는 바이에른 왕과 교황청의 영향력을 못마땅하게 여겨왔던지라 전쟁 중 신교의 편에 붙었고, 결국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헤센은 독일 지역의 대표적인 신교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된다. 헤센 지역이 신교로 돌아서면서 오랜 카톨릭 교회의 전통을 지닌 풀다 역시 전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정점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수도원과 각종 필사본, 고문헌들은 불태워지고 카톨릭의 위세가 주춤하면서 풀다의 번영 동력 역시 움츠러들게 된다. 하지만 헤센 영주였던 빌헬름 입장에서도 오랜 전통을 가진 도시를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인지 프라하 협약 이후 풀다의 교회와 주교 및 수도사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게 된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들을 재건하면서 카롤링거 시대의 건축물들은 바로크 양식으로 대체된다. 현재 남아있는 풀다 구시가지의 건물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새로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다. 하지만 카롤링거 시대의 찬란한 르네상스가 끝난 이후에도 헤센의 문화적 중심지로써의 역할은 명맥을 유지한다. 30년 전쟁의 반동으로 카톨릭 구교에서 부흥한 예수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다시 도시가 재건되었고, 1626년에 성 마리아 수도원이 세워지고 1734년에는 예수회 수사 아달베르트가 풀다 대학교를 건립함으로써 도시는 다시 지적 부흥기를 맞게 된다. 초기 기독교부터 근세 바로크까지의 역사가 한 도시 내에 중첩되어 있는 셈이다.










 현재 풀다를 상징하는 건축물은 18세기에 건립된 성 살바토르 대성당이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웅장한 대성당은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풀다를 있게 한 초기의 풀다 수도원 자리에 지어진 이 성당 내부에는 풀다의 창시자나 다름없는 성 보니파키우스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직선적이고 뾰족한 첨탑이 주로 돋보이는 고딕 양식과는 달리 둥근 지붕과 장식적이고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은 아기자기한 도시와 제법 잘 어울린다. 화려하지만 엄숙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고딕 양식과 달리 바로크 양식은 장식적이되 보다 생동감 있고 활기하다는 인상을 준다. 건축과 조각에 맞춰지는 초점이 하늘에 존재하는 신에서 지상에 실재하는 인간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아름다움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달라진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중세가 막을 내렸다고 해서 종교의 영향력이 갑자기 줄어든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하늘 위의 신에서 실존하는 지상의 인간 자신에게로 내려왔다 할지라도 여전히 대다수의 인간들은 불확실함이 가득한 삶 속에서 의지가 되는 존재를 찾기 마련이기에 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부패한 교회에 반발한 개혁가들의 목소리가 방아쇠를 당기며 치열한 종교전쟁이 도시를 할퀴고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과거 도시를 번영하게 해주고 상인과 지식인들을 끌어 모은 원동력을 원했고 그 때문에 풀다는 천천히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는 과학 기술이 인간의 의문 대다수에 답을 하며 신을 대체하는 시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은 절대 줄어들지 않았고 현실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인간들은 다시 신이라는 존재의 품으로 회귀하는 길을 택한다. 30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을 태반삼아 세상에 등장하게 된 대성당은 자기가 태어나게 된 계기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시대가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 내면의 불안함이 자신을 존재하는 원동력이라는 사실 역시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종교라는 존재가 하는 본연의 역할을 위해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 볼 뿐이다. 성당은 도시만큼이나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도시보다는 조금 더 화려하고 웅장하다. 그리고 해가 넘어가기 직전 둥근 성당의 지붕과 첨탑에 노을이 걸릴 때면 마치 머리위에 면사포를 얹은 성모가 장막을 걷고 거처로 돌아가는 모습과 유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피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 같은 실수와 고뇌를 반복하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성당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쓸데없는 상상은 접어두기로 했다. 단지 성당의 정교하면서 생기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사만을 표하며 해가지자마자 성당에 작별 인사를 고했다.












 허나 그런 복잡하고 다난한 역사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겨울이 되면 크리스마스가 열리고 사람들은 역사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는 도시의 정취를 느끼며 따뜻한 와인 한잔을 홀짝이기 위해 크리스마스 마켓 노점에 모여든다. 해가 떨어지고 완전 어둠에 잠긴 풀다는 낮의 풀다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햇살 아래에서 반짝거리던 색색의 도시는 어둠에 잠겨 불빛 속에 그 모습을 비추며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크리스마스 마켓에 모여든 사람들을 맞아준다. 아름답고 웅장하고 생동감 넘치지만 다소 무거워 보일 수 있는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은 크리스마스 전야를 즐기는 사람들의 담소와 제법 잘 어울린다. 한번 화마가 된 후 다시 태어난 도시는 이전의 명성을 그대로 회복하진 못했지만, 대신 우아함과 인간적임이 공존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얻었다. 그리고 도시의 새 얼굴은 전란의 세월은 살짝 뒤로한 채 새 시대의 사람들과 삶을 감싸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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