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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도빌-트루빌/20150529-20150530] 다 잊어버리고 싶었던 날 (2)

 다음 날, 언제 그렇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냐는 듯 날씨는 아주 쾌청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태양은 환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마치 어제의 비바람은 없었던 일이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아쉽게 꼭 떠나는 날만 날씨가 좋냐는 생각이 들어 서운할 만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래도 떠나기 전에 맑은 하늘의 도빌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역시 같은 장소라도 날씨에 따라 인상이 확 바뀐다. 첫날의 도빌이 비바람을 쏟아내며 회색과 청색이 뒤섞인 우울한 우수를 자아내는 도시였다면, 떠나는 날의 도빌은 태양과 바다를 끼고 빛나는 새하얀 보석 같은 휴양지였다. 첫날에는 그렇게 우중충하게 각이 져 보이던 도빌 시내의 건물들 역시 태양빛을 받으니까 평화로운 동화마을처럼 보였다. 날씨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인간의 감정과 느낌이란 거대한 자연의 변화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붕이 뾰족한 노르망디 전통 양식의 건물들이 가득한 도빌 시내는, 번잡한 파리의 시내에 비하면 너무 작고 평화롭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 곳곳에서 배어나오는 여유와 정갈함을 보면 이곳에 ‘고급’ 휴양지임을 느끼게 된다. 인상파들이 노르망디를 고향으로 삼고, 이사도라 던컨을 비롯한 예술가들과 사교계 명사들이 도빌에 별장을 가졌던 이유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지금도 도빌은 파리지앵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바다임과 동시에 영국, 독일 등 유럽의 상류층들이 요트와 별장을 구비해놓는 고급 휴양지이다.














 구름이 싹 걷히고 태양이 환하게 모습을 드러낸 도빌의 바다는 보석 그 자체이다. 여전히 바닷물은 차가웠지만, 첫날의 발이 시리던 차가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띠고 있었다. 살짝 슬리퍼를 벗어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몸 전체를 시원하게 관통하며 답답함을 해소해주는 차가움이 혈관 속으로 스며들었다. 북해가 주는 냉기가 마음속에 쌓여있던 답답함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것 같았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높게 떠있는 태양이 나를 위로해주며 다 잘 될 것이라고 속삭여주는 기분이 들었다. 











 첫날의 젖어있던 음울한 바다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산뜻한 바다의 모습, 그리고 적당한 온도로 피부를 감싸는 태양의 감촉에 그대로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요즈음은 바다가 꽤 좋다. 바다만 보면 좋아 죽을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바다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때는 바다가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하고 변덕스러운 소용돌이 같았고, 작년에 한국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더더욱 바다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다지 바다가 두렵지 않다. 더욱이나 이때의 노르망디 바다는, 시원하고 선선한 푸른색이지만 부스러지는 햇살이 녹아들어 따뜻한 공기로 나를 감싸 안아주었다. 파리로 돌아가서 남아있는 할 일도, 내가 당장 겪고 있는 문제가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저 잔잔한 바다와 맑은 태양이 주는 편안하고 여유로운 공기만이 있었을 뿐이다.

















 기차역 앞에 있는 다리를 경계로 두고 도빌과 트루빌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왕 이곳까지 왔으니 한 번 둘러보자는 생각에 다리를 건너 트루빌로 향했다. 넉넉한 여유와 한적함이 느껴지는 도빌과 달리 트루빌은 좀 더 북적거리고 붐비는 도시이다. 물론 파리에 비하면 둘 다 아주 작고 아담한 도시이지만, 관광객과 별장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도빌에 비해 트루빌은 정말로 그곳에 거주하며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더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트루빌은 수산시장이 아주 유명한 곳인데, 다리 옆 바닷물을 따라 수산시장들이 늘어서있다. 1036년 처음 시작된 트루빌 수산시장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수산시장으로도 유명하다. 365일 연중무휴인 이 수산시장은 독일,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내에서도 아주 명성이 높아 연일 관광객으로 가득 차 있다. 수산시장애서는 즉석에서 선택한 수산물을 손질해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는데, 꼭 부산 자갈치 시장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마침 내가 트루빌에 들렀을 때에는 주말 벼룩시장이 한창이었던지라 활기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어느 나라든, 가장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활기가 넘치는 곳은 시장이라고 생각한다. 파리의 벼룩시장들도 참 좋아하는데, 트루빌에서도 벼룩시장을 만나니 왠지 반가웠다. 골동품들이 신시한 듯 구경을 하는 아이들, 조금 더 깎아달라고 흥정을 하는 손님들과 줄다리기를 하는 상인들의 모습에는 활기가 넘친다. 허나 짧은 여행지라고 하는 것은 오래 머물지 못하므로 더 매력이 있는 법, 구경에 시간가는 줄 모르다보니 어느 새 파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할 일과 공부의 산더미에 지쳐서 허덕일 때 훌쩍 떠난 1박 2일의 짧은 휴식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나긋하면서도 여유로운 작은 도시의 공기는 확실한 안정의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평소의 활기와 무언가에 집중하는 끈기가 조금은 그리웠다면 그저 내 착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