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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토리노/20150604-20150607] 시간의 스펙트럼, 그리고 실재와 환상의 경계선

 둘째 날의 토리노는 여전히 더웠다. 한국처럼 습기로 인해 푹푹 찌는 찜통 같은 느낌을 주는 더위는 아니다. 굉장히 건조하기 때문에 일단 그늘이나 실내에 들어오면 시원하다. 하지만 태양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낮에 돌아다니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과 햇빛에 대한 내성을 요구한다. 한국의 더위가 습기 가득한 만두 찜통이라면, 이탈리아의 더위는 철판 위에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빛을 직격탄으로 맞으면서 탈수기에게 습기를 빼앗기는 것 같은 더위이다. 세련미가 넘치고 정교한 건물들과 잘 정돈된 거리는 일류 세공사의 손을 거친 다이아몬드만큼이나 아름답지만, 결국 더위에 지친 나는 거리 구경을 미루고 박물관 관람을 하기로 결정했다.










 토리노의 중심은 궁전 앞에 펼쳐진 카스텔로 광장이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궁전과 각종 기념물, 박물관, 그리고 쇼핑몰과 시내가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카스텔로 광장 우측에는 팔라초 마다마(Palazzo Madama), 즉 왕비의 궁전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 궁전은 몬페라트 후작이던 윌리엄 7세가 자신의 거처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13세기의 건축물이 기원이지만, 이후 17세기 프랑스 왕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나 사보이 왕가의 지오반나 바티스타가 공식 주거지로 사용하면서 팔라초 마다마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각도에 따라 보는 궁전의 건축 면들이 각기 다른 양식을 띠고 있는지라 따로따로 떼어서 보면 한 건물인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카스텔로 광장에서 보이는 궁전의 전면부는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으로 당시의 유명한 건축가이던 유바라가 설계한 것이다. 엽서와 포스터에 가망 많이 보이는 마다마 궁전의 모습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유바라는 궁전 전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고, 이로 인해 궁전의 전면부를 제외한 부분들은 중세시대 모습 그대로의 형태를 간직한 채 남게 되었다. 카스텔로 광장을 벗어나 측면과 후면에서 보이는 궁전의 모습이 궁전보다는 중세시대의 요새에 더 가까운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이탈리아의 황혼파 시인인 고차노(Gozzano)는 이처럼 여러 건축양식이 중첩된 마다마 궁전의 모습을 두고 “로마시대에서부터 이탈리아 통일까지, 토리노의 역사를 돌 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마다마 궁전의 진가는 내부에서 드러난다. 우아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경쾌한 내부 장식과 석조 부조들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손꼽힌다. 현재 시립 예술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지금도 건물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박물관으로 쓰이는 건물 내부에는 주로 중세와 르네상스의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건들면 살아 움직일 것 같이 정교하게 표현된 조각들은 굳은 표정으로 기도와 사색에 잠겨있다. 사람의 피부 못지않게 매끄러운 표면과 섬세한 옷 주름들은 전성기 이탈리아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동시에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을 살던 사람들의 세계관과 염원이 형상화되어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역시 피에타 상이다. 르네상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피에타 작품은 토리노 르네상스 예술을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이다. 이미 생기를 잃고 늘어진 예수의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굳은 의지와 지상의 미약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 서려있다. 생명이 빠져나간 예수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는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보고 있노라면 조각에서 흘러나오는 비통한 울음소리가 실내 전체를 매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이 지배하던 전성기 중세의 무거움은 없고 대신 르네상스 특유의 섬세한 인체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달할 수 없는 신과 천상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지상의 고통을 모두 떠안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한 예수와 같은 존재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던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궁전 안의 유물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팔라초 마다마의 우아한 모양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궁전 밖을 나왔지만 여전히 거리에는 더위가 짙게 남아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더위를 피하기 위해 팔라초 마다마 건너편, 카스텔로 광장의 한 가운데에 있는 왕의 궁전인 팔라초 레알레(Palazzo Reale)로 들어갔다. 팔라초 레알레는 영어로 번역하면 로얄 팰리스(Royal Palace), 즉 왕실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토리노의 팔라초 레알레는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사보이 왕가의 궁전이다. 지금의 프랑스령 사부아에서 시작된 이 가문은 11세기에 처음 역사에 등장해서 알프스 이남으로 세력을 확장한 후 이탈리아로 진출한 가문이다. 나중에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는 왕국으로 성장해 유럽사의 흐름에 큰 획을 긋기도 한다. 14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을 뒤흔든 내전을 주도한 왕비 안느(Anne de Savoie)도 바로 이 사보이 출신이다. 오랜 시간동안 피에몬테 지방을 지배하며 니스와 제노바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이 가문은, 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이탈리아보다는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문이다. 실제로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사보이 지방과 사보이 왕가에서 쓰는 말은 이탈리아어보단 프랑스어와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카부르, 가리발디 같은 인재들을 고용하고 입헌군주제로의 이행 및 각종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통일국가 이탈리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탁월한 외교 감각으로 이탈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지만, 동시에 겸손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했던 그의 성격은, 1947년의 공화국 헌법 준칙으로 인해 사보이 가문의 정치 참여 및 사보이 혈통 남자의 이탈리아 입국이 금지된 지금도 그가 국부(國父) 혹은 성실왕(誠實王) 등의 애칭으로 불리며 이탈리아인들에게 사랑받는 비결일 것이다. 더불어, 아마 그래서 공화국 정부가 들어섬에도 불구하고 피에몬테 사람들이 토리노의 사보이 왕가를 잘 보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들의 시대는 가고 공화국이 열리면서 과거 사보이 왕가의 영화도 과거의 일부로만 남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전은 여전히 웅장하고 보물들은 화려하다. 역사는 흘러갔고 왕실의 위엄은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남는다. 자꾸 보존하고 간직하려 하는 것은 기억하기 위함이고, 기억을 하는 이유는 현재를 살아가는 원동력과 교훈을 얻고 발판을 삼고자 함이다. 궁전도 보물도 충분히 찬란하고 아름다웠지만 왠지 모르게 엄숙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보이 궁전을 나오면 궁전들을 가운데에 두고 위풍당당하게 직선으로 펼쳐진 카스텔로 광장 정면이 보인다. 태양으로 인해 뜨겁게 달궈진 공기를 식혀주는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사람들이 모여 자아내는 웃음소리로 인해 활기로 가득 찬 토리노의 심장부이지만 이 아름다운 광경 양옆을 에워싸고 있는 삭막한 빌딩의 모습이 어쩐지 어색한 느낌을 준다. 단조로와 보이지만 고전적이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토리노와 너무나도 안 어울리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솔리니가 집권하고 파시즘의 광풍이 이탈리아를 휩쓸던 시기에 국민들을 규합하기 위해 선전용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현대 이탈리아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암흑의 역사인 시기를 지워버리고 싶을 법도 한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궁전들 사이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을 헐지 않고 그냥 두는 것도 역시 역사를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르네상스와 사보이의 찬란한 영광도, 잔인하고 비극적인 이념의 역사도 모두 잊지 않음으로써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이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여러 시대의 다면적인 역사를 아우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경외심이 한 번에 여행자를 아우른다.









 광장을 가로질러 팔라초 레알레를 지나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꺾으면 토리노에서 가장 큰 성당인 토리노 두오모(Torino Duomo)가 나타난다. 흔히들 ‘두오모’라고 하면 웅장한 고딕양식의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을 떠올리지만, 사실 두오모는 이탈리아의 웬만한 도시들엔 하나씩 자리 잡고 있는 대규모의 성당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명사이다. 밀라노나 피렌체에 두오모가 있듯이, 당연히 토리노에도 두오모가 있다. 대부분의 건축이 사보이 시대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토리노에서 두오모는 유일한 르네상스식 건축물이다. 15세기 후반에 성자 요한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성당답게 성당 앞 광장의 이름은 산 지오반니이다. 지오반니는 요한의 이탈리아식 발음이다. 따라서 이 건축물과 광장 모두 요한에게 헌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조롭지만 회색과 백색이 적절하게 조화된 대리석 건물의 깔끔한 미학이 돋보이는 이 건축물은 1997년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것을 복구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의 형상을 지닌 성물(聖物)인 ‘토리노 수의’가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당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물론 1990년대의 탄소측정법 연구로 인해 이 수의가 13세기에 위조된 것임이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성스러운 유물이다. 허나 아쉽게도 내가 갔을 때에는 수의를 볼 수 없었다. 수의는 25년마다 한 번 씩 공개함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데, 마지막 전시가 2000년 이었으므로 다음 전시는 2025년이다. 아쉽지만 조금 더 기다리며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토리노에는 박물관이 많다. 피에몬테의 수도이자 이탈리아 북부에서 손꼽히는 도시이기는 해도 파리나 서울에 비해서 큰 도시는 아닌데 박물관이 20개가 넘는다. 그래서 나는 토리노에게 ‘박물관의 정원’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애칭을 붙였다. 이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장소는 산 지오반니 광장 부근의 고고학 공원과 그 건너편에 위치한 고고학 박물관이다. 고고학 공원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얼핏 보기엔 그냥 보통의 유럽 공원과 다를 바 없는 잔디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리노의 고고학 공원은 특별하다. 로마시대의 성벽 유적을 발굴한 후 그대로 개방하여 시민들이 볼 수 있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고고학 유적을 박제로 두지 않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과 조화시켜서 개방한 점이 기발하면서도 놀라웠다. 딱딱하고 어려워 보이는 고고학과 역사라는 분야를 현재의 공간 속에 숨 쉬게 하여 친근한 존재로 탈바꿈하게 한 점, 그리고 역사를 훼손하지 않고 존중하면서도 일상의 일부로써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토리노 시민들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허물어진 성벽 유적을 옆에 두고 잔디밭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지니는 시민들의 모습이나, 여전히 길가에서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통행로의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는 팔라티네 문을 보면 역사라는 존재가 하늘의 별처럼 멀고 낯선 것이 아닌 우리 삶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팔라티네 문은 토리노를 대표하는 유적 중 하나로 과거 갈리아에서 이탈리아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했었다. 중세 시대에는 여성 전용 감옥으로 쓰여서 파괴를 면하고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양 옆의 첨탑이 기존 로마시대의 양식과는 다르게 변형되었다. 19세기 초, 고고학 열풍이 불면서 이탈리아의 한 고고학자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거의 원형으로 복원되었지만 중세에 증축되면서 변형된 탑의 모양은 중세 시대의 유적을 보전하는 차원에서 그대로 둔 지라 양 탑의 모양이 살짝 다르다. 그리고 문 앞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세워진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은 파시즘 시대에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선전용 프로파간다로 내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이탈리아의 역사가 한 장소에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는 공원 건너편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르네상스 시대 사보이의 별궁이었던 건물을 고고학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데, 박물관 앞에서 발견된 1세기의 극장 유적은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하지만 이를 덮어놓지 않고 박물관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이 유적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토리노는 사보이 왕가의 중심이자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수도, 그리고 동계 올림픽과 자동차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토리노를 근현대의 역사만 있는 젊은 도시라고만 생각하지만 사실 토리노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토리노의 기원인 포 강 유역의 켈트 시대 촌락부터 시작해 에트루리아 도시, 로마의 식민지이자 본토로 통하는 관문을 거쳐 찬란한 사보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토리노 고고학 박물관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켈트와 에트루리아의 흔적에서는 도시의 기원을 찾을 수 있고, 한 때 세계를 호령한 로마 제국의 영광을 통해 토리노의 역사를 볼 수 있다. 특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로마 제국의 16대 공동 황제로 즉위한 당대의 웅변가 루키우스 베루스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이 이 박물관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덥수룩한 수염과 곱슬머리, 굳게 다문 입과 부리부리한 눈매에서는 그의 차분한 성격과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고, 현대의 기술과 미적 감각에도 뒤지지 않는 섬세한 은 세공들을 보면 그저 감탄만이 나온다. 지나간 제국의 영화에 쓸쓸해질 법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사가 인간의 일상 속에 살아 숨 쉬며 사람들의 삶에 활력을 고취시키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미소가 지어진다.












 이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토리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생각 이상으로 토리노는 정말 볼 게 많고,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가는 걸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눈과 귀를 열어야만 했다. 토리노는 근대 국가 이탈리아의 초대 수도인 만큼 잘 정비되고 계획된 도시인지라 로마나 베네치아 같은 도시들에 비해 젊은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건물들이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고 복원된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도시 곳곳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역사들이 녹아있고, 이들이 스펙트럼을 이루면서 장관처럼 펼쳐진다. 토리노는 특히 야경이 정말로 아름다운데, 고층 건물이 늘어서 이루는 스카이라인 때문에 야경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밤이 되면 빛을 반사하면서 빛내는 옛 건물들과 열기가 식은 시원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의 활기가 조화를 이루면서 프랑스나 독일의 도시들과는 다른 매력의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카스텔로 광장이나 테라스 식당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면서 재잘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조용히 이들을 지켜보며 가볍게 눈을 붙이는 대리석 건물들의 속눈썹까지. 모든 것이 한여름 밤의 꿈같지만 엄연히 살아 움직이는 실재이다. 밤의 거리 한가운데를 지나다니는 멋쟁이 이탈리아인들 사이로 고대 로마나 중세 시대의 사람들이 슬쩍 걸어 나올 것만 같은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토리노의 밤은 환상적이었다. 허나 환상은 어디까지나 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펙트럼처럼 여러 시대가 조화를 이루는 역사의 공간에서는 딱 절반만이 머릿속의 환상이고 나머지 절반은 정말로 존재하는 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