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貪知 : 읽다

18세기 연인열전 (1) 에밀리아 갈로티(Emilia Galotti) : 순수를 위해 사는가, 관능을 위해 사는가

에밀리아 갈로티(Emilia Galotti)

고트홀트 E. Lessing, <에밀리아 갈로티>, 1772년 作

"순수를 위해 사는가, 관능을 위해 사는가"

 

 

▲2006/2007년 독일 하노버의 한 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에밀리아 갈로티> 포스터

 

 ″폭력! 누군들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겠습니까? 폭력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아녜요. 유혹이야말로 진짜 폭력입니다. 제 몸에도 피가 흘러요, 아버님. 어느 누구 못지않게 젊고 뜨거운 피가요. 저도 관능이 있답니다. 저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어요″

- 에밀리아 갈로티 中

 

  멋진 약혼자가 있는 아름답고 순수한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을 빼앗아 자신의 수중에 넣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영주. 아마 요즈음도 많이 볼 수 있는 스토리 구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주를 어디 대기업 사장으로 바꾸고 여성의 아버지를 사장의 부하직원으로 설정하면 요즘 TV에서 방영하는 소위 ‘막장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가 오직 시청률만을 위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각종 복잡한 인간관계 설정을 투척하는 요즈음의 막장 드라마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바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 때문일 것 이다.

 

 바로 이와 같은 복합성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혼란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권선징악과 단순한 갈등구조의 TV 드라마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악 혹은 선 어느 쪽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의 캐릭터들과, 단순히 가족극 이냐 정치극 이냐의 차원을 넘어 뭐라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다면적인 극의 구조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우선, 작품의 성격을 딱히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가 없다. 단순히 흥미위주의 플롯으로만 짜여진 로맨스라고 하기엔 부조리한 사회와 체제에 대한 강한 저항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부조리를 고발한 정치풍자극이라고만 하기엔 플롯의 구조와 소재, 그리고 이야기의 진행이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통속적이다.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악역인 영주는 무조건적인 악인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따스한 면이 존재하는 인간적인 인물이고, 책임감있고 다정한 아버지 오도아르도는 가치의 수호를 위해 딸을 죽이는 비정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더욱 매력적이다. 요즈음의 드라마에도 등장하는 스토리 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코드인 사랑과 욕망은 현대인의 세상사에도 가장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이며, 또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지만 동시에 강한면도 지니고 있는 에밀리아나 지적이면서도 동시에 사랑에 대한 집착과 질투심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오르시나 같은 인물들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아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대략 3세기 전에 쓰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이야기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지금과 같이 연애결혼이 보편화된 시기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일부일처제가 성립된 이래로 결혼은 경제적 필요성과 생물학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사회적 계약에 불과했다. 근대사회가 형성되고 여성의 행동에 대한 인식 변화 및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결혼이라는 행위에 낭만으로 불리는 요소가 가미됨으로써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연애와 결혼의 개념이 확립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현대인들의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낭만적인 연애, 혹은 사랑이 그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단순히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낸 틀에 의해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서 재생산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는 극중의 영주나 에밀리아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영주는 자신이 에밀리아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에밀리아의 아름다운 외모가 지닌 관능에 이끌리는 욕망에 불과할 뿐 에밀리아라는 한 인간 자체를 사랑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피아니와 에밀리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에밀리아에 대한 아피아니의 감정 역시 자신의 원하는 삶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 불과했으며 동시에 에밀리아의 부친 오도아르도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생각하는 전제가 붙어있었기에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는 부적절하다.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주인공인 에밀리아의 행동 자체가 의구심을 부추긴다. 에밀리아는 그저 부모님이 정해준 상대이기에 아피아니를 사랑한다고 믿을 뿐 실제로 그녀가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감정으로 아피아니를 사랑하는 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녀는 아피아니가 속삭이는 사랑의 말이나 그와의 결혼보다는 영주의 유혹이나 그리말디 부인의 집에서 경험하는 관능의 세계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유혹이나 관능은 그녀의 죽음, 자살로써 끝을 맺는다. 그녀에게 있어서 관능은 부정한 것이며 순결은 고결한 것이므로 순결을 지키지 못하는 행위는 죽음으로써라도 끝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순결이 단순히 고결한 미덕의 차원을 넘어 그녀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아니, 순결이 그녀의 삶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보다 깊게 살피면서 읽어보면 에밀리아는 오직 순결이라는 가치만을 위해서 태어난 여성 같다. 아피아니와 사랑을 한다기보다는 그와의 사랑을 위해 순결을 유지하는 자신과 자신의 삶을 찬양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그녀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간다. 순결을 위해 사랑을 하고 삶을 살며 그러지 못할 경우는 다른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다. 삶을 살아감으로 인해 사랑을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순결을 지킨다는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결과와 과정이 뒤집힌 것 이다.

 

 물론 이 같은 에밀리아의 삶에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하여도 이것이 영주나 마리넬리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을 결코 아니다. 아무리 그 근원이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라 한다 하여도,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박탈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인권의 침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 그들의 탄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에밀리아는 죽음을 택하게 되었으니 무엇으로도 결코 이들의 부정을 정당화 할 순 없을 것이다.

 

 관능은 생물학적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생리적 욕구이며, 사랑은 사회학적 인간에게 있어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요소이다.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는 이러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 즉 생리적 욕구를 기반으로 한 관능과 주체적 정신의 행위를 기반으로 한 낭만적인 사랑이 뒤엉킨 관계의 다층적인 면을 보여줌으로써 시공을 넘어 21세기의 독자와 소통한다. 또한, 이 작품은 모든 정치적 참여욕구와 기회가 박탈되고 좌절된 독일의 시민계급이 부조리한 기존 체제의 질서 속에서 어떻게 기득권의 탄압 아래 스러져 가는 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랑이라는 환상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탄압 속에서도 부단히 맞서다 좌절해야 했던 그들의 모습이 바로 에밀리아의 모습이고 아피아니와 오도아르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자유롭게 연애와 정조를 선택하고 실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