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貪知 : 읽다

18세기 연인열전 (2)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 무엇을 사랑이라 하며, 무엇을 위해 울 것인가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 Wolfgang von Goethe), 1774년 간행

"무엇을 사랑이라 하며, 무엇을 위해 울 것인가"

 

 

▲ 2011년 독일의 한 극장에서 상연된 연극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中

 

 현대는 사랑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노래를 들어도, TV를 틀어도, 책을 집어 들어도,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랑을 만날 수 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중에는 소위 ‘연애 기술’ 혹은 ‘연애지침서’라는 책들이 항상 포함되어있고, 아직 교제하는 상대가 없는 대학생들은 교제 상대를 구하기 위해 미팅이나 소개팅을 한다. 헌데 이 넘쳐나는 사랑들을 모두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고 감정의 결핍을 느끼며, 극단적으로는 사랑이라고 느끼는 상대를 찾지 못하는 걸까? 사랑이란 무엇이고, 우리가 정말 사랑을 하고 있는지, 사랑의 영원한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한번 생각해보자.

 

 바로 우리의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눈물을 흘린 경험이 많았다. 그러나 요즈음의 젊은이인 우리들은 더 이상 베르테르의 사랑을 보면서 울지 않고, 베르테르와 로테의 사랑이야기는 더 이상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집착과 미련에 얼룩진 한 남자와 우유부단한 여자의 ‘찌질하고 쿨하지 못한’ 이야기일 뿐. 왜 우리는 베르테르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왜 우리의 마음은 베르테르의 이야기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단순히 ‘사랑’에 대한 가치관과 정의가 변해서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현재를 사는 젊은이들에겐 베르테르와 로테에게는 있던 ‘무엇’인가가 결핍된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각화되고 수량화된 현대에는 사랑조차도 시각화·수량화되어 사랑에 대한 정해진 ‘규격’이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다. 사랑의 대상인 상대는 육체적인 측면에서 혹은 물질적인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이상화된 규격에 맞아야하며 규격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더불어 상대방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면 바로 단념하고, 상대방과 관계를 끝낼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응해주는 ‘쿨함’은 필수다. 그러나 베르테르가 로테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규격’을 지정해놓고 로테를 그에 맞추려 했던가? 베르테르는 끝까지 로테를 귀찮게 하고 민폐만 끼쳤는가? 이에 대해 나는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겠다. 책을 섬세하게 읽어보면 그 어느 곳에도 로테의 외모나 집안, 금전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찾아볼 수 없다. 베르테르의 초점은 오직 로테의 동생들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아름다운 영혼’에 맞추어져 있으며, 그 어느 상황에서도 그는 사회에서 정해진 특정한 규격에 따라 로테를 보지 않고 오로지 로테 그 자체에만 자신의 시선을 맞추고 있다. 또 베르테르는 모든 순간에, 설령 그것이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로테에 대한 사랑을 위해 있는 힘을 쏟으며 이는 로테와 알베르트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마지막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로테가 알베르트와 결혼하여 ‘사회속의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삶까지 바칠 정도로 로테에 대한 사랑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사랑에 있어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 그저 시장에서 일상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듯이 사랑을 거래하는 거대한 시장에서 ‘규격화된 상대’를 사는 우리들의 사랑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극도로 인간이 물신화되어 인간이 만든 사물과 자본의 질서가 인간을 지배하는 주객전도의 현대 사회, 사랑을 거래하는 시장과 물건처럼 규격화된 사랑의 기준은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이다. 이처럼 사랑시장을 지배하는 거대 기업의 논리가 우리의 정서까지도 지배하는 사회에서, 정형화된 사물질서와 물신화된 인간양상을 거부하고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베르테르의 사랑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기에 권력은 끊임없이 베르테르의 사랑을 ‘찌질하다’, ‘못나다’, ‘우유부단하다’ 등의 부정적인 단어로 규정짓고 우리는 이에 세뇌되어 이들이 만들어낸 사랑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마치 그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자연적으로 내재된 질서인양 착각하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베르테르의 사랑을 낯설어 하는 이유는 베르테르의 사랑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혁명’이다. 베르테르 속의 인간은 물신화된 인간이 아니라 본연의 긍정적인 면과 선한 면을 지닌 인간이며, 베르테르의 사랑은 물신화된 대상에 대한 집착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아니라 이를 뒤집는 인간 본연에 대한 진지한 영혼의 사랑이다. 타인을 사랑을 할 줄 아는 자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모순을 위해 싸울 수 있다. 실로 사랑이란 인간 정신에 있어서 가장 고결한 기적이자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혁명의 기초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물신화된 질서 속에서 왜곡된 사랑이 아닌, 베르테르가 보여준 것처럼 인간에 대한 가장 최선의 믿음이자 존중인 영혼의 사랑이다. 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가 심화된 현대 사회에 반하는 정신의 혁명이며 동시에 시장의 논리에 세뇌당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참모습을 두려워하고 낯설어 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인해 더 이상 베르테르를 읽으며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굳이 베르테를 읽으라고 할 생각도, 혹은 읽고서 눈물을 흘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베르테의 눈물, 혹은 베르테르를 읽고 흘리는 그 눈물은 결코 ‘쿨하지 못한’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용기의 신체적 상징이며 동시에 그대와 그대의 연인 모두가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인간이ㄱ라는 증거라는 사실에 대해서 다시 환기하고자 한다. 인간이 다시 베르테르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그 시점이 곧 현대의 규격화된 문명 속에서 상실된 인간성을 되찾는 날이며, 아울러 그 때가 바로 우리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일어나는 날이며 동시에 세상이 바뀌며 역사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진보의 길로 방향을 바꾸는 날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그날은 인간이 잃어버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날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우선 베르테르를 찌질하고 못났다고 비난하기 이전에, 베르테르를 읽고 그 눈물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다. 눈물마저도 싸구려 감성팔이의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현대사회에서 언제쯤 이 것이 가능할 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