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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뮌스터/20150622-28] 서늘함의 형태로 만든 도시, 비, 교회, 그리고 자전거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서늘한 쾰른의 첫날을 보낸 다음 날, 나는 곧장 역으로 가서 뮌스터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중세사나 건축 관련해서 가장 볼 것이 많은 곳이 독일 남부에서는 뉘른베르크고 북부는 뮌스터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뮌스터는 쾰른보다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와 니더작센 주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이다. 기차로는 대략 2시간 정도 걸린다. 본래 뮌스터라는 말 자체가 주교가 지배하는 주교좌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 지명이 여러 군데 존재하는 지라 뮌스터를 표기할 때는 베스트팔렌(Westfalen) 지방의 이니셜인 ‘W’를 병기한다. 허나 그 수많은 뮌스터들 중에서 뮌스터라는 고유명사가 아예 도시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곳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그만큼 구교 카톨릭의 영향력이 크고, 주교의 권한이 절대적인 도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하나로 묶여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가 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폴레옹 전쟁과 독일의 통일 이후에 만들어진 최근의 역사일 뿐이다. 이 지역은 종교전쟁 당시에도 구교와 신교가 뒤얽혀 각축전을 벌이던 곳이었고, 전쟁 이후에도 수많은 군소 영방으로 나뉘어 혼란이 지속된 곳이다. 그러므로 라인 강 북부를 의미하는 노르트라인과 그보다 더 북쪽인 베스트팔렌은 전혀 다른 지역이지만 독일의 통일과 분열, 재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된 것이다. 그 증거로 쾰른과 본, 뮌스터 등지는 전통적으로 카톨릭이 강하고 과거 주교의 통치를 받던 지역이지만 두 지역 사이를 채우고 있는 도르트문트, 하겐 등의 도시들은 프로이센의 영향도 강하게 받은 개신교 지역이다. 드넓은 라인 강 인근 지역이 백여 개가 넘는 작은 군소 국가로 나뉘어져있음이 종교 분포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들이 모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이라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인 것은 불과 한 세기도 채 되지 않았다. 역사는 흐르고 그에 따라 한 지역의 이름이나 행정도 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른 근현대사의 굴곡이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차창 밖으로 시시각각 바뀌는 하늘 색깔을 보며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뮌스터에 도착해 있었다.









 뮌스터는 확실히 서늘한 도시였다. 쾰른보다도 훨씬 더 차갑고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북쪽이라는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얼핏 듣기는 했어도 그래도 쾰른에서 뮌스터로 오는 기차 안에서 본 하늘은 대부분 해가 떠있는 맑은 상태였기 때문에 안심을 했지만, 뮌스터로 내리는 순간 뿌연 회색으로 변하며 서늘한 바람이 불자 마음속에 살짝 불안이 일기 시작했다. 뮌스터는 칙칙한 날씨로 유명한 독일 내에서도 가장 날씨가 안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오죽하면 "비가 오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는 교회 종이 울린다. 그리고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면, 그날은 일요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허나 그래도 도착 당시에는 빗방울은 안 떨어지고 쌀쌀하게 바람만 부는 정도인지라 안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보다 자전거의 개수가 더 많다는 자전거의 도시답게 역 앞에는 자전거들이 대열을 이루며 주차되어 있었고, 길 곳곳에서는 외투로 몸을 감싸 사람들이 싸늘한 바람을 가르며 페달을 밟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다니는 데에 별 문제가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관광안내소로 가서 지도를 받았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지도를 들고 관광안내소를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비가 우수수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우수수 쏟아지는 빗줄기에 입을 쩍 벌리자 지나가는 독일인들이 내 모습을 보고 피식 웃는다. 다른 독일인들 역시 무심하게 모자 한 장만 둘러쓰고 자전거를 밟으며 당황해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입가에 웃음을 던진다. 신문지를 옆구리에 끼고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이런 날씨가 뮌스터에서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라며 농담을 던진다. 수시로 비가 쏟아지며 변덕을 보이는 날씨에 익숙한 그들에겐 아마 당황해하는 나의 모습이 조금 웃겼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약 15분 정도를 기다리니까 빗줄기가 조금 약해졌다. 때는 이때다 싶어 얼른 우산을 펴고 발걸음을 옮겼다.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빗줄기가 가늘 때 돌아다니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걸으니 금방 뮌스터 시내의 중심가이자 관광의 시작인 구시가지에 들어섰다. 이 구시가지는 중세부터 뮌스터의 중심지 역할을 한 도시의 심장부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독특한 양식이 돋보이는 구 시청사 건물이다.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고 후에 복구된 건물이지만, 독일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담고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기에 이 구 시청사가 가지는 의미는 더욱 크다. 바로 이 구 시청사에서 30년에 걸친 종교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 나던 종교 갈등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이 허수아비가 되어 독일이 수 백 개에 이르는 영방국가로 갈라지는 시초가 생겨난 곳이다. 이곳에서 독일의 중세가 끝을 고하고 새로운 역사의 챕터로 가는 장이 넘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지 곳곳에는 중세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구 시청사 근처에 위치한 푸른색의 탑이다. 지금도 꾸준히 종이 울리는 이 탑은 원래는 종교 재판에서 마녀로 판명된 사람들을 매달아놓은 탑이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 마녀를 매달아 말려 죽이는 처형대였다. 더불어 종교전쟁 당시 패배한 사제들을 가둬두고 서서히 죽인 또 다른 종교 처형대이기도 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뾰족한 고딕 양식과 푸른빛의 지붕이 인상 깊은 탑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소름이 오싹 돋았다. 뮌스터의 날씨가 안 좋은 이유엔 베스트팔렌 저지대의 습지와 라인 강, 그리고 도르트문트 운하가 저기압과 만나는 지리적 요인이 가장 큰 원인일 테지만 그 이면에는 억울하게 마녀로 몰린 사람들의 한이 퍼부어대는 저주도 한 몫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음울함이 도리어 뮌스터라는 도시가 지닌 아우라는 더 깊게 해주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반쯤 구름이 낀 도시의 서늘한 감촉은 딱딱한 고딕풍의 도시 건축과 어우러져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쾰른보다 훨씬 작고, 조용하고, 엄숙하지만, 활기차고 역동적인 쾰른과는 다른 이 도시만의 정적인 분위기가 또 다른 인상을 남긴다. 특히 칙칙한 회색 하늘 아래에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서있는 교회들의 모습과 바람을 가르며 도로를 질주하는 젊은 자전거 라이더들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자아내는 풍경이 굉장히 기묘하다. 파리나 쾰른도 그렇지만 뮌스터도 그에 못지않게 교회가 많은 도시이다. 주교가 직접 관할하는 도시였던 만큼 세속 권력의 힘보다는 종교 지도자의 권위가 더 강한 도시였고, 이에 따라 수많은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한 마디로 말해 뮌스터는 교회와 수도원이 성장하면서 커간 종교 도시 그 자체인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교회는 구 시청사와 한 블록을 두고 있는 람베르트 교회이다. 구 시청사가 자리한 거리인 프린치팔마크트(Prinzipalmarkt)’는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중심 시장정도 된다. 중세부터 쭉 이 거리에서 시장이 열리고, 사람과 물건, 각종 소문들이 이곳을 통해 들어가고 나갔기 때문이다. 지금 이 거리는 상점가가 들어선 뮌스터의 중심가이다. 어쨌거나 시장이라는 역할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여느 중세도시들이 그렇듯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에는 항상 교회가 있다. 프린치팔마크트의 맨 끝에 위치한 뮌스터의 람베르트 교회는 14세기에 완공된 후기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뮌스터에서 2번째로 큰 교회로 과거 뮌스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교회이기도 했다. 이는 이 교회가 신앙뿐만 아니라 도시생활 전체에 있어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람베르트 교회는 한자 동맹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로써 시장과 함께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도시의 심장이기도 했다. 장거리 무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중계무역이 발달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영국과의 목재 거래가 뮌스터에 번영을 알려다주었다. 화려한 교회건축과 정교하고 현란한 시계 역시 이 같은 번영의 결과물인 것이다. 또한 도시 전체에 시간을 알리는 가장 큰 종이 람베르트 교회의 종인지라 상인들과 시민들 모두의 시계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인 만큼 공론의 장 역할도 수행해왔다. 특히 1933년부터 뮌스터 대주교로 취임한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폰 갈렌이 나치에 의해 집도된 안락사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며 반 나치 운동을 이끈 장소로도 유명하다. 장애인, 동성애자, 노약자 등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안락사를 시행한 나치의 잔혹함을 비판하고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기독교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반 나치 인사인 그는 뮌스터의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가 나치의 비인간성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저항을 종용하는 설교를 한 주요 장소가 바로 람베르트 교회이다. 얼핏 보면 살짝 음울한 느낌을 주는 뾰족한 첨탑의 고딕 교회는 중세의 번영부터 비극적인 현대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한 번에 안고 있는 장소이다. 찬란한 시대부터 불행하고 잔인한 시간까지 묵묵히 받아내면서 회색 하늘 아래 서있는 그 모습은 슬픈 영광이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뮌스터 최고의 건축물은 역시 뮌스터에서 가장 큰 교회이자 제 1예배당의 역할을 하는 성 파울루스 대성당이다. 뮌헨의 성모교회처럼 지붕이 푸른색으로 칠해진 이 건축물은 뮌스터의 대주교가 직접 관할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대주교의 거처 역할도 하고 있다. 딱딱한 직선과 섬세한 부조 장식이 돋보이는 이 성당은 1225년에서 1226년 사이에 지어졌다. 성당의 건축 양식에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모두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성당이 건립된 시기가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전반적인 미적 추세가 전환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성당은 뮌스터의 중심가인 프린치팔마크트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곳 특유의 활기가 도는 람베르트 교회와는 달리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 아래에 오롯이 뾰족하게 서있는 모습에선 쾰른 대성당의 웅장함과는 다른 고고함이 느껴진다. 쾰른 대성당이 그로테스크하지만 웅장하고 힘찬 인상을 준다면, 뮌스터의 파울루스 대성당은 세상의 풍파를 딛고 신에게 한 발 더 다가서는 나이 든 주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당 안에는 종교 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조각상들과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천문 시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뇌에 찬 얼굴로 애써 고통을 참으며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조각상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침 넘기는 소리조차도 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긴 회랑으로 이루어진 성당 내부에는 숨을 가라앉게 만드는 엄숙한 공기가 가득 차 있다. 이 길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가면 잔디밭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주교의 묘역이 있다. 지난 번 밤베르크에서 본 대성당처럼, 역대 주교들의 묘역을 대성당 내부에 안치해 놓은 것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종교적 공간을 보자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인상이 살짝 찡그려지기도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꼭 마음을 무겁게 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특별히 종교가 없는 사람이지만, 가끔은 신이라는 존재를 앞에 두고 경건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설령 그 신이 실체가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말이다.















 한참 성당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성당 앞에 자리 잡은 베스트팔렌 예술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예술품들을 모아놓은 순수 미술 박물관으로, 북부 베스트팔렌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 중 하나이다. 차분한 공기 속에서 조용히 숨을 쉬며 차창 밖의 대성당과 함께 나를 바라보는 전시품들의 모습은 꽤나 매력적이다. 이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죽은 듯 살아있는 듯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지만 눈만큼은 열려있는지라 한 눈을 팔수가 없다. 잠깐만 딴청을 피우거나 하품을 해도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 허튼 짓을 할 수가 없다. 누가 오든 말든 도도하게 나른함을 표시하는 루브르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곳의 작품들은 조용하게 입을 다물며 숨소리조차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모듬 것을 다 보고 있다. 때로는 기괴하고 오싹한 느낌도 들지만 마냥 싫지만은 않다. 한 시가 아쉬운 여행자에게 뭐라도 하나 더 보여주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살짝 웃음이 나기도 하고 말이다.












 박물관 관람을 끝내고 나오자 다시 비가 내렸다. 잠깐 개나 싶었던 뮌스터의 하늘은 어느 새 칙칙한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회색 대기 사이로 쏟아지는 빗방울은 싸늘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비가 내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공기를 가르며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지금의 뮌스터는 인구의 3분의 1이 학생인 대학 도시이자 독일 내에서도 손꼽히는 예술 학교가 있는 예술 도시이다. 좁은 골목길을 오토바이 뺨치는 속도로 전진하는 자전거들 역시 젊은 인구로 활기가 넘치는 뮌스터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뮌스터는 인구수보다 자전거가 더 많은 도시로도 유명하다. 중앙역 앞부터 시작해서 도시 곳곳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에게 뮌스터의 첫인상은 비, 교회, 그리고 자전거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뮌스터에 와도 분명 이 셋은 여전할 것이다. 물론 또 다시 비를 만나고 싶지는 않다만 그건 그 때의 운에 맡겨두도록 하는 게 좋을 성 싶다. 치열했던 종교 전쟁도, 패배자나 이단자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여 버리는 잔혹함도, 다 지나간 옛날 얘기이고 이제 도시는 새로운 활력을 바탕으로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부디 그것들이 내가 다시 뮌스터에 오는 날까지도 변하지 않고 나를 맞아줄 수 있기를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