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耽世 : 느끼다

[쾰른/20150622-28] 도시의 척추와 심장을 가로지르다

 쾰른은 교회가 많은 도시이다. 앞선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성 아포스텔렌 교회 외에도 11개, 총 12개의 로마네스크 양식 중세 교회가 쾰른에 존재한다. 물론 그 이전에는 더 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있었지만 지난한 역사의 과정과 전쟁 속에서 많은 수가 불타 없어졌고, 지금 쾰른에 남아있는 교회는 웅장한 대성당을 제외하면 모두 12개이다. 그 험난한 역사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교회가 많이 남아있는 도시이다. 그만큼 이곳이 카톨릭 신앙의 중심이자 종교의 힘이 강한 곳임을 증명하는 셈이기도 하다.







 쾰른에 있는 교회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교회는 아데나워와 비잔티움 황녀 테오파노의 역사가 깃든 아포스텔렌 교회이지만, 아포스텔렌 교회 말고도 또 좋아하는 교회가 있다. 바로 쾰른 중앙역 북쪽에 위치한 성 아그네스 교회이다. 쾰른 중앙역 북쪽은 관광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멋진 교회 건축물들과 한적한 녹지들이 숨겨진 곳이다. 그러니 조금만 발품을 팔면 도시의 역사를 알 수 있음과 동시에 도심 속의 보석 같은 공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곳을 꽤 좋아한다. 도시 특유의 삭막한 회색과 직선 사이에 숨어있는 종교의 흔적들과 녹색들이 한 데 공존하는 것이 부조화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잘 어울리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는 등의 알 수 없는 매력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성 아그네스 교회는 대다수의 쾰른 교회들과 달리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아닌 신생 교회이다. 1896년에 지어지기 시작해 1906년에 완공된 이 교회는 쾰른에 있는 교회들 중에서는 젊은 축에 속한다. 신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60미터에 달하는 첨탑으로 유명하다. 그 시기까지 새 교회가 지어지고 그것도 고딕 양식을 최대한 답습했다는 점이 꽤 놀랍다. 새삼 쾰른도 바이에른 못지않은 카톨릭의 중심지라는 것을 이런 데서 깨닫게 된다. 










 성 아그네스 교회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대로 맞은편으로 성 게레온 교회가 보인다. 로마 시대의 기독교 탄압에 맞서 순교한 테베 출신의 성녀 헬레나에게서 유래된 이 교회는 수차례의 증축을 거쳤고, 9세기에 쾰른 대주교 힐데볼트의 명에 따라 지금과 같은 규모를 갖게 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 공사를 거쳐 14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성 게레온 교회의 진정한 매력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붕과 건축의 형태를 볼 때 드러난다. 둥근 바실리카 양식과 고딕 양식의 과도기에 완성된 건물답게 두 양식의 특징들이 혼재되어 있다. 바실리카 양식 특유의 둥글고 무거운 느낌과 고딕 양식의 뾰족함이 공존한다. 특히 둥글둥글함과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육각형 모양의 푸른 지붕은 이 교회 건축이 지닌 과도기적 매력의 정점을 보여준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대리석 덩어리일 뿐 건물의 형태가 지닌 매력을 알기 힘들다. 물론 이곳이 관광지가 아닌 주거 지역인지라 우거진 다른 건물과 도로 때문에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를 보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건축 사이에 우뚝 솟은 교회의 모습은 이질적이지만 아름답다. 푸른 지붕은 회색의 도시와 대비되어 차분하고 성스러운 느낌을 선사한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바뀌어도 건축에 담긴 영혼이 지니는 아우라는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게 뻗은 현대 도로 너머로 보이는 대성당의 모습역시 이 장소의 매력이다. 성 게레온 교회에서 나와 대로를 걸으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바로 소실점 끝에 자리 잡은 대성당의 모습이다.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현대식 건축물들 각종 회사 및 은행 사무실들 사이에 자리 잡은 대성당의 모습은 뭔가 기괴하지만 한편으로는 귀엽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잘 짜여진 사각형 테트리스처럼 하나하나 각이 맞춰 있는지라 장난감 레고들 같다는 인상을 주는 건물들 위에는 DHL이나 Volksbank 같은 유명 회사의 로고들이 붙여져 있다. 이 모습은 정말로 장난감 레고를 조립한 모습을 연상시켜서 내가 정말로 미니어처 속에 들어와 있나 싶은 착각을 주는데, 특히 내가 돌아다닐 때에는 거리에 사람이 없어서 이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점점 발걸음을 재촉해서 대성당과의 거리를 좁히면 어느 새 쾰른이라는 도시가 주는 활기로 되돌아간다. 도로 너머에서 보는 대성당은 카프카의 '성채'에 나오는 성처럼 도달하고 싶으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몽환적인 존재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서 마주하는 대성당은 언제나 그곳에 서서 등대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대성당에 가까워질수록 성 게레온 교회는 멀어지면서 다시 신기루 같은 존재가 된다. 실재에서 멀어질수록 성 게레온 교회의 형제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오히려 심리적 거리는 더 벌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 걸음을 떼면 뗄수록 실재와 환상이 매번 뒤바뀌는 그 느낌 때문에 이곳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성 게레온 교회 근처에는 중세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얼핏 보면 공원 같지만 자세히 보면 중세 시대의 성벽 일부가 그대로 남아 옛 도시의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 시대에 세워진 도시인만큼 본래 초기 도시의 경계망은 로마 시대에 세워진 성벽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로마제국이 쇠망의 길을 걷게 되면서 북방의 게르만족들이 경계를 허물고 내려오자 방어를 위해 요새를 덧쌓게 되고, 다시 이것이 보다 깔끔한 형태로 완비되면서 중세 시대의 성벽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어쩐지 비현실적이다. 눈앞에는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가 도시의 척추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고개를 돌리면 녹색의 테두리가 둘러진 성벽 바깥으로 영주의 행차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쾰른은 삭막한 회색으로 가득 찬 현대적인 도시이고 젊은 인구도 많은 활력 넘치는 도시이지만 이럴 때는 꼭 수백 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 도시 안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쾰른은 과거에만 갇혀있는 도시가 아니다. 쾰른은 독일에서 가장 큰 방송국이 있는 미디어 도시이자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원래 쾰른의 주요 산업은 향수, 섬유, 기계, 와인 등과 같은 1차 제조 산업이 주를 이루었지만 80년대 이후 경제 구조가 변하면서 더 이상 1차 산업만으로는 도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3차 산업 위주로 도시를 재편하게 되면서 방송과 미디어가 도시의 새로운 주력 산업으로 떠오르게 된다. 쾰른이라는 도시를 지탱하던 1차 산업들로는 80년대의 유가 폭등 및 대량 실업으로 인한 경제 위기를 해쳐나가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85년, 쾰른 시는 오랫동안 유럽 내에서 손꼽히는 출판업의 중심지이던 도시의 특성을 현대적으로 살리기로 결정을 내린다. EU 출범과 유럽 통합에 대비해 독일 곳곳에 흩어져 있던 미디어 및 정보통신 산업을 이곳에 모아 실리콘밸리를 육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쾰른 시에서는 중앙역 북부의 버려진 화물 터미널 부지를 매입한다. 그리고 시 의회와 공무원들이 직접 건축 계획에 참여했고, 기본적인 도시 설계와 조직 및 운용은 쾰른 시에서 담당했다. 이와 같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여 조성된 도심 내의 신 도시단지가 바로 쾰른 미디어 파크이다.














 쾰른 미디어 파크는 미디어 타워와 공원 및 주변의 주택 단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일종의 미디어 특화 복합 단지인 셈이다. 현재 쾰른에는 서부 독일에서 가장 큰 방송국인 WDR(West Deutscher Rundpunkt)가 위치해있고, 독일의 3대 스튜디오 중 하나인 MMC가 미디어 타워에 입주해있다. 뿐만 아니라 소니, BMG, EMI 등의 대규모 음반 회사와 기획사가 들어서있고, 이들의 업무를 원활하게 보조하기 위해 필요한 각 분야의 인력들이 미디어 파크 인근의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독일의 영화와 TV 프로그램의 30% 이상을 만들어내는 대표 멀티미디어 도시이다. 위기를 맞아 단행한 혁신이 도시를 성공적으로 한 단계 성장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미디어 파크는 무작정 현대적인 회색 도시만을 기준으로 두고 만들어진 뉴타운이 아니다. 새로 짓는 어떤 건물도 쾰른 대성당보다 높을 수 없다는 규제 때문에 미디어 타워는 쾰른 대성당보다 약 5m 가량 낮춘 형태로 완공되었다. 미디어 타워가 본래의 계획보다 낮은 150m에서 그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유럽의 경관 규제는 한국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하다. 건축물 하나를 짓기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논의하고 의견을 모으고 주민들의 찬반을 물으며, 이 기간이 길어지면 건물 하나가 완공되는 데에까지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쾰른 미디어 타워 역시 건축 논의가 나온 시기는 85년이지만 완공된 시기는 2001년이다. 미디어 타워의 건축을 두고도 수많은 의견이 오갔는데, 결국 문화유산인 쾰른 대성당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도시의 정체성과 경관 유지를 위해 좋다는 합의가 도출된 것이다. 덕분에 쾰른 대성당은 도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라는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고, 새로운 산업구조를 가진 신도시로 개편이 되면서도 기존의 도시가 가지는 정체성과 자긍심을 잃지 않고 성공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결정을 단기간 내에 내리고, 그에 따라 도시도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느린 속도이다. 허나 그게 마냥 이상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부럽다. 한 도시의 정체성과 경제적 이점을 동시에 살리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논의하고 고민할 수 있는 그런 문화가 부럽다. 도시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인성을 형성하지만, 반대로 그런 도시를 만들기 위해선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힘은 성찰과 고민에서 나온다. 우중충하고 삭막한 것 같지만 강하고 활기찬 고딕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도시 쾰른을 만든 건,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면서 미래 세대에게 더 좋은 도시를 물려주겠다는 강한 의지를 실천한 시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