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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쾰른/20150622-28] 도심 속의 카오스, 시간이 한데 모여 엉켰을 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라 하면 지난번에는 못 이룬 ‘도보 여행’을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걸어서 쾰른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유적지들을 방문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 가장 큰 성취였다. 일단 날씨가 개자마자 내가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바로 노이어마크트(Neuemarkt)이다. 영어로 치면 ‘뉴 마켓(New Market)’으로 번역되는 노이어마크트는 쾰른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쉴더가세와 연결된 쾰른의 대표적인 상점가이며, 동시에 내가 지난 크리스마스 방학 때 머문 숙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랬던 지라 그 때 매일같이 노이어마크트와 주변을 둘러보며 산책을 하는 것이 여행 중의 일과로 자리 잡았었다. 숙소에서 시내나 대성당 쪽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노이어마크트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쾰른의 번화가인 만큼 활발했던 노이어마크트의 크리스마스 마켓과 예쁜 천사 장식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이어마크트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둥근 바실리카 양식의 아포스텔렌 교회와 아데나워 동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노이어마크트로 향했다.





 쉴더가세를 가로질러 쾰른 시내를 관통하면 이내 아이스크림이 얹혀 있는 재미있는 모양의 건축물이 보인다. 마치 아이스크림을 콘 채로 빌딩에 꽂아 넣은 그 형상이 신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데, 이 건축물이 노이어마크트 구역의 상징인 노이어마크트 쇼핑몰이다. 건물 위에 아이스크림이 얹혀져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쇼핑몰에 쾰른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스크림 집이 입점해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보이는 지라 마치 도심 한 가운데에 거인이 아이스크림을 먹다 던져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치 있고 귀엽게 느껴진다.











 노이어마크트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작년 겨울 내가 쾰른에 머문 열흘 동안 매일같이 지나다닌 거리 위에는 그때와 같이 트램과 지나다니고 골목 하나하나가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이고 있었다. 단지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진눈깨비가 뭉쳐서 내리던 회색의 하늘이 싹 걷히고 태양과 흰 구름이 사이좋게 어깨를 기대고 있는 푸른 하늘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번화한 현대 도시 한 가운데에서 시간이 멈춘 양 위용을 드러내던 아포스텔렌 교회 역시 그대로였다. 트램과 자동차, 자전거,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 귀부인의 가면 마냥 나무로 정면을 살짝 가린 아포스텔렌 교회의 둥근 지붕이 멀리서도 시선을 잡아끈다. 다소 우중충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쾰른이라는 도시의 트램 선 한 가운데에서 언제 시간이 흘렀냐는 양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아포스텔렌 교회만큼은 13세기에서 그대로 정지된 것 같다. 반가웠지만 일단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아데나워에게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포스텔렌 교회 옆,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거리 바로 옆에 살짝 인상을 쓴 채 서있는 청동의 동상이 바로 아데나워 이다. 얼핏 보면 너무 왜소하고 초라해서 이 사람이 바로 그 서독의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가 맞는가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하겠지만, 그의 삶을 생각하다보면 한편으로는 수긍이 간다. 쾰른 출신이었고, 쾰른에서 정치를 시작해 쾰른 시장까지 역임했지만 나치에 대항하다가 축출당하고 다시 쾰른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말년에 수상이 된 그의 인생은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동상보다는 묵묵하고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는 수수한 동상과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불행한 역사의 목격자임과 동시에 항상 행동하는 자들에 앞장서 걸어가는 사람이었던 그는 결코 화려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고는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단단하고 고집스럽고 묵직한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그가 성공적으로 전후 서독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쾰른은 도시 전체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드레스덴 못지않게 전쟁의 상처를 심하게 입은 도시이다. 2차 세계대전을 확실하게 종결짓는다는 목적 하에 영국군 공군 장교 해리스가 대규모 폭격을 강행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고 실종자만 3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융단 폭격’이라는 말이 괜히 2차 세계 대전 말의 쾰른 공습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다. 노이어마크트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역시 이처럼 역사의 교차가 한 공간 안에 뒤엉켜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13세기부터 21세기까지, 지난한 역사의 흔적들이 한곳에 늘어져있지만 시간 순의 파노라마처럼 쭈욱 스펙트럼 모양을 지니지 않고 마치 서로 다른 시간들이 뒤죽박죽 얽혀있는 카오스마냥 뭉쳐서 꿈틀대고 있다. 번화한 현대 도시의 심장부에 13세기의 교회와 성문이 달랑 놓여 있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고, 그 부분만 유난히 도심 속에 갇힌 섬 같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포스텔렌 교회는 지금도 매우 아름다운 교회이다. 먼 콘스탄티노플에서 시집 와 오토 2세의 아내가 된 비잔티움 공주 테오파노에 의해 봉헌된 이 교회는 고딕 양식의 쾰른 대성당에 뒤지지않는 기품이 느껴지는 건축물이다. 그리고 성벽이 잘려나간 채 문만 남아 덩그러니 노이어마크트에 남겨진 성문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시장과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인해 또 다른 생명력을 얻으며 여행자를 반겨준다. 중세의 흔적은 머나먼 역사의 기억으로 박제화 된 그들의 이야기 위에 현재의 생명들이 덧입혀지며 새로운 힘을 얻고, 도시의 불행한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낸 한 인간은 이젠 조용히 교회 아래에서 쉬면서 그의 후예들을 지켜보고 있다. 어쨌거나 시간은 흐르고 지금의 시간도 조금만 있으면 과거의 것으로 화하여 우리의 곁을 떠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억의 의무가 있다. 치열하게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과거를 잊지 않고 자꾸 되새기는 이유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억을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의무를 역사라고 부른다.







 노이어마크트를 걷다보니 문득 머리가 복잡해져서 아무런 생각 없이 쭈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왠지 계속 걸어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강박적으로 직진을 하자 녹색으로 가득 찬 공간이 나타났다. 끝없이 이어져 지평선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녹색의 잔디들이 갓 세공된 다이아몬드마냥 반짝반짝 빛나는 사각형 모양의 인공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쾰른은 웅장하지만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 회색의 도시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큰 녹지가 있을 줄은 몰랐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식히기 위해 연못 앞에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세포 깊은 곳 까지 쌓였던 노곤함이 풀리면서 마음의 근육에 들어간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녹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긴장이 풀리고 여유가 생기자 힘이 나서 잠시 공원을 걸었다. 생각보다 공원은 꽤 컸고,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을 것도 같았다. 뮌헨의 영국 정원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그래도 도심에서 이 정도면 굉장히 큰 녹지이다. 걷다 보니 공원의 일부분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이름이 붙어있다. 독일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이고 패전국인 일본. 결국 일본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큰 상처를 입고 나서야 전쟁을 포기했다. 지금도 진행 중인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이 그들이 치른 대가이다. 허나 혹독한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두 나라가 걷고 있는 길은 사뭇 대조적이다. 그리고 이 두 나라의 행보가 꼭 유럽과 동아시아의 미래를 대비해서 보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녹색의 공원은 조용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곳이지만, 그 공원에 붙어있는 이름은 숙연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그것만이 이 드넓은 공간의 전부가 아니었다. 공원은 독일에서도 큰 규모의 캠퍼스로 이름난 쾰른 대학교와 연결되어 있다. 조금 발걸음을 옮기자 삼삼오오 떼를 지어 일광욕과 운동을 즐기고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는 젊은 학생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은 푸르른 젊음을 자랑하며 재잘거리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활기가 내게도 생기를 불어넣는다. 한 번도 캠퍼스가 넓거나 여유 공간이 큼직한 학교를 부러워해본 적은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쾰른 대학교의 큰 캠퍼스와 건물들이 부러워졌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캠퍼스랄 것도 없는 언덕 위의 작은 학교였고, 파리의 대학들은 파리 시내 전체에 강의실이 흩어져 있지 달리 캠퍼스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넓고 큰 캠퍼스에 대한 기대도 환상도 없었지만, 그 때 따스한 햇살과 드넓은 녹색 캠퍼스를 만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씻고 나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다시 원래 내가 보고 싶었던 것들을 보기 위해 아포스텔렌 교회로 되돌아갔다. 마음의 무거움을 덜고 난 그때서야 겨우 아데나워 씨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잘 지내셨나요? 확실히 겨울보단 지금이 낫죠?’







 아포스텔렌 교회 근처에는 역시 쾰른의 번화가이자 최신 유행의 중심지인 에렌슈트라세(Ehrenstraße)가 쭉 뻗어져있다. 에렌슈트라세는 대성당 앞의 쉴더가세 만큼이나 사람이 많고 언제나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지만 그보다는 좀 더 세련되고 깔끔한 부티크들이 입점해있다. 딱딱한 직선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다소 답답하다는 인상을 주는 독일의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서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건물은 이 거리의 서점 건물이다. 활짝 속살을 드러낸 책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하는 이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서점에 들어가 책을 하나 사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참 책의 손길에 갈등하면서 에렌슈트라세의 인파를 헤치고 샛길로 빠지면, 다소 뜬금없는 듯한 인상을 주는 오래된 구조물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조용한 골목길에 홀로 둥둥 뜨는 것 같은 벽이 건물 사이에 몸을 눕히고 있는데, 이 벽은 로마 시대에 세워진 성벽의 일부이다. 쾰른은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다. 쾰른이라는 도시 이름 자체가 식민지를 의미라는 라틴어 ‘콜로니움’에서 유래했다. 로마 군대의 식민지이자 전쟁 요새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크게 번영하여 로마 제국 북부의 도시들 중 손꼽히는 대도시가 되었고, 희대의 미치광이인 네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오빠이자 폭군으로 이름을 날린 칼리굴라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아버지이자 티베리우스의 조카이던 용장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만과 대척하는 방어선상에 위치한 중요한 요새이던 쾰른에서 주둔한지라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이는 그만큼 쾰른이 로마 세계의 중요한 도시임과 동시에 일찍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임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쾰른은 독일의 도시들 중 로마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이다. 로마 시대의 성벽은 쾰른의 시원이 된 역사를 말해주는 증거이자 가장 오랫동안 쾰른 시의 변화를 지켜 본 시대의 산 증인이다. 지금의 쾰른은 서독일의 가장 큰 도시이자 독일의 4번째 도시로 성장한 현대 대도시이지만, 이렇게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들은 지난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해온 오랜 도시의 역사를 말해준다. 이미 없어졌다고 생각한 것들을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만나기 때문에 더 큰 경이로움을 느끼고, 결코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한층 더 반가운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