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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엑상프로방스/20150701-03] 무엇이 행복이란 감각을 만드는가



 파리는 프랑스이고, 프랑스는 곧 파리이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라서 굳이 한 번 더 쓰기도 지겨운 문구이다. 서프랑크 왕국과 카페 왕조 성립 이후, 유럽에서 줄곧 하나의 국가를 유지해온 유일무이한 중앙집권국가인 만큼 그 수도인 파리가 가지는 위상과 영향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가장 프랑스인들이 꼽는 프랑스적인 지역은 파리가 아니라 프로방스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흔히들 생각하는 '낭만적이고 예쁜 풍경'이라는 편견만 가지고 보자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파리는 어디까지나 거대한 도시 파리이지만, 프로방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햇빛이 빛나는 보석 같은 장소이다. 한 마디라, 파리는 그냥 파리일 뿐이지만 프로방스는 프랑스의 보석이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가장 프랑스적인 지역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게 아닐까 싶다. 파리는 전 세계인들의 도시지만 프로방스는 프랑스의 보석이니까 말이다.


 나 역시 이와 같은 명성을 들었기에 엑상프로방스로 휴가를 떠났다. 물론 학기 끝나자마자 쾰른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귀국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던지라 뭐라도 할까 생각을 하던 와중에 엑상프로방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문득 파리지앵인 친구들과 지중해 출신인 동료들이 '사람은 태양을 쐬어야 한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건넸던 것도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충동적으로 티켓과 호텔을 결제하고, 독일에서 돌아온 지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은 날 남쪽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6월 말에도 변덕스러운 날씨와 쏟아지는 비를 보여준 독일과 달리, 분명 남쪽에는 비타민 D와 활력이 가득한 태양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여행 짐 속에 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침 기차인지라 좌석에 몸을 눕히자마자 눈이 감겼다. 아침 기차 타는 것을 꽤 좋아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졸린 눈이 스르르 감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몇 번을 여행을 가도, 여행을 가는 전날 밤은 심장이 뛰면서 잠이 안 오는 버릇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오전 일찍 기차를 타는 날은 으레 졸린 눈을 비비며 좀비처럼 여행 가방을 끌고 아슬아슬하게 열차에 몸을 싣고 나면 자연히 눈이 감겨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기차 놓치지 않은 것이 어디냐는 생각을 하면서 여행 가방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는 좌석에 머리를 기대 잠을 청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다가 창문을 통해 전해지는 햇살의 따가움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졸음이라는 풀로 붙여져 안 뜨이는 눈을 억지로 비비고 여는 순간, 동공 안으로 파고드는 놀라운 광경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파리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산 능선들과 그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계곡들, 이에 한술 더 떠서 산과 산에 걸쳐서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는 로마시대 수로교의 완벽한 건축적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게 지금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인지라 기지개를 켜고 다시 눈을 비비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풍경은 또렷해진다. 그리고 곧 있으면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아주 높지는 않지만 완만한 능선을 그리는 산꼭대기와 하얀 집들과 로마시대의 유산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이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의 열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열차 차창을 통해 받은 햇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뜨거움이 살갗에 내려앉았다. 독일도 여행 중반부터는 날씨가 꽤 좋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는 여전히 변덕스러운 회색 구름의 기운이 짙게 남아있었는데, 엑상프로방스에는 토리노와 제노바 못지않은 환한 태양이 높은 하늘의 정 가운데에 걸려있었다. 느긋하게 햇살을 받으며 누워 낮잠을 자는 듯한 형상의 산과 인사를 하며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태양의 나라에 왔다!’는 짧은 탄성을 담아. 햇살은 뜨거웠지만 건조했던지라 그럭저럭 돌아다닐 만 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내가 파리를 떠나자마자 파리는 40도에 이르는 이례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지만 엑상프로방스는 33도를 오가는 건조한 더위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쪽의 태양을 찾음으로써 더위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텔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바로 엑상프로방스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생 소뵈르 대성당이었다. 사실 랜드마크라고 말하기도 좀 애매하다. 엑상프로방스에는 파리의 에펠탑이나 쾰른의 대성당, 혹은 프랑크푸르트의 코메르츠 방크 건물처럼 멀리서도 한눈에 볼 수 있는 커다란 건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엑상프로방스에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규모가 크고 높은 건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 고만고만한 높이에 특별하게 튀지 않는 단순한 디자인의 사각형 건물들이 중첩되어있다. 생 소뵈르 성당도 마찬가지인지라 앞서 언급한 대도시들의 거대한 건축물들과 비교하면 작고 아담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상프로방스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꼽으라고 하면 이 성당이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생 소뵈르 성당은 크기나 규모가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성당이다. 다소 그로테스크하지만 금방이라도 하늘을 가를 것 같은 쾰른 대성당의 뾰족한 첨탑, 전성기 프랑스 왕의 권력과 힘이 느껴지는 우아한 파리의 노트르담이나 랭스의 대성당, 강변의 성처녀를 연상시키는 새하얀 자태의 오를레앙 노트르담 같이 사람을 압도하는 힘은 없다. 허나 생 소뵈르 성당에는 이 같은 거대한 건축물들에는 없는 가장 중요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바로 둥근 곡선의 미와 섬세한 조형의 미가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규모와 아름다움이 꼭 비례하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무조건 크고 높은 것만이 성당 건축의 최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워낙 오랜 기간에 걸쳐서 증축된 지라 이 성당의 건축 양식을 밝히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다. 원래 이곳은 로마 시대의 공공 회의장과 마을 정기 시장이 열리던 포룸(Forum)이 있던 곳이지만 시대가 변하고 로마가 쇠퇴함에 따라 신에게 봉헌된 장소가 되었다. 6세기에 처음 지어진 예배당이 이 성당의 시원이지만 지금과 같은 건물 형태를 갖춘 것은 12세기 즈음이고, 이후 16세기까지 장장 400여년에 걸치는 시간동안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며 현재의 모습을 띄게 된다. 따라서 이 성당은 처음 건축을 개시할 당시에 유행한 고전적이고 둥근 로마네스크 양식과 12-13세기에 절정을 이룬 카톨릭의 고딕 양식, 그리고 그 이후의 건축 양식까지 더해져 만들어진 기나긴 건축사의 퇴적층인 것이다. 여전히 성당의 가장 깊은 곳에는 6세기에 지어진 예배당이 남아있지만, 다른 한쪽 벽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그림이 걸려있다. 건축물 그 자체가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비록 파리나 랭스, 쾰른 등의 도시에서 본 거대한 성당들과 비할 수는 없는 크기이지만 아름다움과 가치를 매기자면 결코 밀리지 않는다.










 생 소뵈르 대성당의 아름다움은 주변 환경과 겹쳐지는 순간 극대화된다. 거대하고 웅장하지는 않은 아담한 규모에 베이지색과 흰색이 섞인 오묘한 빛을 띠고 있지만, 이 구조물이 청명한 하늘과 맞닿는 순간 자아내는 시각적 조화는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아치는 여느 성당 못지않게 화려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지만 전혀 조잡스럽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뾰족한 고딕의 첨탑 대신 둘러진 다각 모양의 종탑 옆에 십자가를 들고 서있는 성 미카엘 대천사의 모습은 위풍당당하다기 보다는 여유롭고 느긋해 보인다. 근엄하고 엄숙해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 것 같은 기존 성당의 조각들과는 달리, 갑옷을 입고 십자가를 들고 있어도 푸른 하늘과 태양에 모든 일과를 맡기고 느긋하게 지나가는 행인들을 쳐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맑은 프로방스의 날씨와 부드러운 성당의 색감 때문에 드는 일시적 착각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엑상프로방스의 건축이 지니는 아름다움은 생 소뵈르 대성당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엑상프로방스는 걸어서 직접 눈으로 보는 순간에 진가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인데, 이는 이곳의 건축이 지니는 독특한 아름다움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보면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똑같은 모양의 사각형 건물들이 단조롭게 줄을 지어 늘어진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특히나 사진으로 본다면 더더욱 이런 단조로움 들만 유난히 풍경 속에서 강조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걸으면서 실제로 눈에 담는 순간 이 단조로워 보이는 풍경 속에 엄청난 빛과 색의 스펙트럼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베이지색, 흰색 등의 옅은 색들로만 이루어진 건물들은 보면 볼수록 한 색채 내에 이렇다가 다양하고 풍성한 명암과 톤이 있었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고, 낮은 건물들은 인간과 친근한 눈높이를 자아내면서 시끄럽지 않게 각자의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 모든 풍경들이 프로방스의 맑은 태양과 푸른 하늘과 맞닿으면서 오감을 모두 하나로 합일시키는 감각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건물 자체의 색채와 창밖에 장식된 꽃들이 주는 다양한 시각적 리듬, 따스한 태양의 기운이 가득한 공기가 피부에 닿으면서 부드러움으로 변하는 느낌, 햇살과 꽃과 물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은은한 후각, 그리고 공기 중을 날아다니다 조용하게 귓가에 내려앉는 속삭임까지. 자연과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거리를 걷는 사람을 감싸 안는 프로방스의 건축은 실로 ‘인간의 얼굴을 한’ 포근한 건축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단지 이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감각을 부족한 언어와 사진으로는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울 뿐이다.













 엑상프로방스에는 분수가 많다. 그래서 이 도시의 별명이 ‘분수의 도시’이다. 로마 시대부터 로마의 갈리아 속주 중 최대 규모이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지역의 중심도시였었는데, 오랫동안 한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이렇게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분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풍부한 수자원이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 풍부함을 뽐내고 있고, 덕분에 도시 어디를 가더라도 투명한 물이 콸콸 샘솟는 분수들을 만날 수 있다. 쨍한 태양이 항상 하늘의 한가운데 걸려서 당당하게 몸을 뉘이고 있는 프로방스임에도 불구하고 쾌적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끈적거리지 않는 건조한 공기와 어디를 가든 만날 수 있는 시원한 분수 덕택이다. 신기한 것은 그 어느 분수도 똑같은 모양인 것이 없고, 제각기 다른 형태와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내에는 약 100개가 넘는 분수가 있는데 모든 분수마다 고유의 이름과 조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지라 지나다니는 곳마다 분수를 구경하고 분수의 이름을 확인하는 재미가 있어서 더더욱 도보의 묘미가 있는 도시이다. 처음에는 파리에 비해 작은 도시의 규모와 단조롭고 낮은 건물들에 실망을 할 수 도 있겠지만, 잠시 모든 전원을 끄고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오감으로 음미하는 순간 찬란한 자연과 부드러운 건축의 아름다움이 감각이라는 형태로 변하면서 마지막엔 감동으로 다가온다. 사소한 순간에도 작은 것들을 통해 여유로움을 즐기고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이곳을 ‘가장 프랑스적인 곳’이라 칭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