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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엑상프로방스/20150701-03] 한 여름밤의 꿈이 남긴 잔상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환상적인 이틀은 금방 지나가고 어느 새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떠나기 싫어서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체크아웃 시간이 곧 다가옴을 알리는 프론트의 전화를 받고 애써 일어나 짐을 챙겼다. 어쨌거나 여행이 아름다운 것은 일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다. 차곡차곡 짐을 개어 넣다 문득 내가 무언가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잠시 앉아 골몰히 생각하니 그 유명한 프로방스의 시장에 가보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시간을 보니 오후가 멀지 않은 지라 조금만 지체하면 시장이 파할 것 같아서 서둘러 짐정리를 마친 후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기껏 이곳까지 와서 시장을 보지 못한다면 후회할 것 같았기에 정신없이 뛰어갔다.















 다행히 시장은 내가 도착했을 때에도 활기차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엑상프로방스 시청사 옆에 있는 광장은 음악 축제가 있을 때에는 공연장으로 쓰이지만, 원래는 이렇게 아침마다 시장이 열리는 장소라고 한다. 로마 시대 때 처음 열린 정기 시장의 전통이 지금까지 살아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미라보 거리의 야시장이 모자, 신발, 장난감, 비누 등의 수공예품이나 수제 화장품 위주의 시장이라면, 이곳에서는 잼, 야채, 과일 등의 식료품을 판다. 모든 농산물은 엑상프로방스 인근 지역에서 재배된 것들이고, 올리브나 절인 야채, 잼 등의 가공식품들도 프로방스에서만 생산되는 특산품들이다. 농산물들은 싱싱한 지라 그 자리에서 사서 즉석으로 먹어도 된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농업 강국인 프랑스 내에서도 최고로 일컬어지는 농업 지역인지라 농산물들의 품질이 전반적으로 아주 훌륭하다. 게다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직접 유통도 담당하기 때문에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자들이 없어 가격도 저렴한 편에 속한다. 농업과 전통 시장을 한꺼번에 살려서 지역 경제를 보호함과 동시에 관광객을 끌어들이면서 또 다른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 정체성을 강화하기까지 하니 일석이조를 넘어선 소득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프로방스의 싱싱한 채소와 과일, 그 중에서 유난히 내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이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수예 장신구인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저씨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예쁜 천으로 만들어진 이 주머니들은 안에 허브를 넣어 방향제 겸 장식품으로 쓰이는 공예품이라고 한다. 천들은 모두 남프랑스의 전통적인 직조 방식으로 제작되었고, 천에 새겨진 무늬 역시 지역 특유의 전통 무늬이다. 허브 주머니들은 아저씨의 어머니께서 직접 손으로 모든 바느질을 해서 만드는 지라 재고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해서 나도 두 개 구입했다. 프로방스에 온 김에 기념품 하나 정도는 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땅치 않아서 포기하려고 한 시점에 좋은 수공예품을 발견한 것이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모양과 은은한 허브의 향이 어우러져 독특한 무드를 주는 귀여운 물품이다. 더불어 이 천과 주머니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를 끈다. 로마시대부터 중세까지 프랑스 남부 최대의 교육도시이자 무역도시였던 이곳에는 이탈리아와 아랍, 비잔티움 등지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인해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중세의 프로방스 시장에서 특히 인기를 끌었던 것은 동방에서 건너온 비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단은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움 황제만이 가질 수 있었던 물건이었고 따라서 불법으로 비단을 거래하는 지하 시장이 형성되게 된다. 이로 인해 비단의 값이 치솟게 되고, 결국 동방의 비단을 복제하는 토속 직물 산업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허브 주머니를 만든 천들의 원조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싸고 아름다운 물품을 향한 사람들의 욕망은 변함이 없구나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마치 라벤더 밭에서 뛰놀아야 할 소녀에게나 어울리는 예쁜 천이 사실은 중세를 풍미한 명품인 동방 비단의 '짝퉁'이라는 것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귀엽고 작은 주머니 하나에 상업과 욕망의 역사가 담겨있다는 사실이 꽤 재밌다. 이런 작은 발견 덕분에 여행이 한층 더 즐거워진다. 여행이란 것은 예상치 못한 발견을 즐기는 자를 위한 색색의 미식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현지인들이 많고, 현지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지 물품이 많은 시장이지만 철저한 가격 정찰제 인데다가 강매나 바가지요금도 없다. 심지어 외국인 관광객인 나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대형마트에 밀려서 골목상권과 재래시장 다 죽는다고 말만 하지 말고, 재래시장이 외면 받고 밀려나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점점 대기업에 잠식되어 골목 상권의 다양성이 상실되고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외지 말씨를 쓰거나 친분이 없는 사람들에게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고 물건을 강매함으로써 골목 상권에 등을 돌리게 되는 측면이 큰 것도 사실이다. 상호 공존과 다양성의 유지를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양 측의 협력과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프로방스의 전통 시장과 작은 가게 및 공방들이 거대 프랜차이즈의 역공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킬 수 있던 것은, 판매자와 구매자간의 신뢰를 잃지 않게 해주는 제품의 질과 합리적인 구매 시스템이 바탕이 되어 그들의 유대관계를 지속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것이 발전하여 외부인들도 이곳을 믿고 구매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고, 이런 신뢰의 시스템이 지역의 문화와 결합하여 명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날씨도, 지역의 특색과 싱싱함이 동시에 묻어난 갖가지 상품들도 부럽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부러움을 자아내는 것은 이 같은 신뢰의 시스템이다. 상생과 발전을 둘 다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신뢰라는 것이 보편화됨에 동시에 이 행위가 '비용이 드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셈이다. 또 신뢰가 있기에 지역의 정체성 유지와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이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고.








 시장 구경을 한 후 천천히 시내를 가로질러 산책을 했다. 마지막 날을 위해 남겨둔 일은 세잔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세잔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내를 가로질러 가야 했기 때문에 차분하게 걸으면서 다시 한 번 풍경을 음미하기로 했다. 그늘과 태양이 만나는 지점에서 분수와 함께 보행자의 더위를 식혀주는 숨어있는 장소들, 강렬한 햇빛이 행여 인간의 동공을 따갑게 할까봐 부드럽게 보듬어주는 은은한 빛의 건물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내는 화분들까지. 지극히 단조롭지만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빛의 세세한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도시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 거장이 이곳을 그렇게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따스하고 환한 날씨이지만 늘어져서 정체된 도시가 아니라 은은하게 베일을 가지고 놀며 분 단위로 각기 다른 인상을 주는 미인을 연상시킨다. 공기는 맑고 사람들의 표정에선 여유가 넘쳐 생기가 흐르지만 한편으로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어서 작업을 하기도 좋다. 거장의 사랑을 받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잔의 집은 엑상프로방스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생 소뵈르 성당을 가로질러간 후 만나는 언덕을 쭉 올라가다보면 세잔의 집이 나온다. 세잔은 꽤 괴팍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여타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꼼꼼하고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으며, 이 때문에 수많은 그림들이 창조자의 손에 찢겨서 명을 달리했다. 분명 그 찢겨서 사라진 그림들 중에도 걸작이 꽤 있었을 텐데 강박적으로 완벽주의를 추구한 거장의 성격 탓에 한 줌 조각으로 생을 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았다. 세잔의 정원도 집도 그런 그의 까탈스러운 성격과 완벽주의를 꼭 빼다 박은 듯 정갈하고 단정하다. 규모가 그리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정원과 창문을 열면 바로 자연이 실내로 들어오는 저택은 완벽한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그에 걸맞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 거장의 집념이 느껴진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거장도 세상을 떠난 지라 집과 정원에는 관광객들만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이 남긴 아우라는 쉽게 지워지지 않은 채 자연 속에 녹아들어 조용히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하자 은근 슬쩍 작별인사를 던진 후 다시 시내로 내려왔다. 여전히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고 태양은 높게 걸린 채 웃고 있었다. 잠깐의 안식을 취하려고 내려온 남쪽이 조금만 더 머물다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느긋한 속삭임을 불어내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가야 할 시간이었고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나 다시 이곳에 온다는 선택지도 있으니 슬퍼할 필요는 없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화창한 날씨를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여행지가 내게 ‘꼭 다시 와야 할 여행지’로 남은 것으로도 충분했다. 태양이 떨어지고 기차가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 이미 지나가버린 새하얀 시간들은 실체처럼 내 눈앞을 오가며 미소를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