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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프랑크푸르트/20151001-08] 안녕, 이상한 나라!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는 날, 내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젠켄베르크 자연사 박물관이다.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와 컬렉션을 자랑하는 자연사 박물관이지만 지난번에 들리지 못해서 아쉬웠던 지라 이번에는 꼭 이곳에 들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망설임 없이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젠켄베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의사이자 생물학자로 의사로서나 학자로서나 흠잡을 데 없는 커리어를 자랑하던 걸출한 인재였다. 죽기 전 그는 그가 모은 동식물 표본을 모두 프랑크푸르트 시에 기증했고, 이게 바로 프랑크푸르트 시의 또 다른 상징이자 자랑거리인 자연사 박물관의 시초이다. 파리와 뉴욕에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자연사 박물관이 있지만 규모나 소장품의 질 면에선 젠켄베르크 자연사 박물관 역시 뒤지지 않는다. 독일을 대표하는 자연사 박물관이 수도인 베를린에 있지 않은 점을 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던데, 독일은 수도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고 프랑크푸르트는 전통적으로 금융과 상업이 강한 도시이다. 경제적인 요소가 크게 작동하는 표본 수집과 과학 연구에서 성과를 이룬 사람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 괴테가 프랑크푸르트 출신이고 하이디의 친구 클라라의 아버지 제제만 씨가 프랑크푸르트의 대상인이겠는가. 인간의 고귀한 정신과 지식을 어찌 돈으로 환산 하냐고 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창작이든 연구든 이를 지탱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없이는 꽃피울 수 없는 법이다. 지성과 문화를 위해선 물질적 기반이 중요함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매번 재확인하게 된다.










 젠켄베르크 자연사 박물관의 명성은 절대 허명이 아니다. 이는 단 5분만 박물관 내를 돌아다니면서 컬렉션을 구경하면 확인할 수 있다. 얼핏 박물관 주변 거리의 칙칙함에 질려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일단 한번 박물관 안에 발을 들이고 나면 감탄과 경이를 멈출 수 없게 될 것이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정교한 표본들은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 종류를 망라하며 전시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서늘한 바람과 적당하게 따스한 햇볕이 피부를 간질이는 맑은 가을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박물관 안에서는 내가 끈적끈적한 습기로 가득 찬 열대로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심리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라 추측만 할 뿐이다. 예전에는 박제들을 보면 박제가 된 동물들이 죽음을 앞두고 느꼈을 공포가 생각나 무서움이 먼저 느껴졌었는데, 요즘은 그런 것들보다는 표본들을 수집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연구한 수집자의 집념과 열정에 먼저 감탄을 하게 된다. 의사이자 생물학자였던 한 개인이 순수하게 본인의 호기심과 학문적 열정을 위해 이 정도의 표본을 수집했다는 것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모은 컬렉션을 공익을 위해 시에 기증했다는 것에서는 감탄을 넘어선 경외감이 든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스스로의 소신과 지적 성취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인류 문명과 지식의 발달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새삼 실감하면서 감사를 표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젠켄베르크 자연사 박물관의 꽃은 공룡 화석이다. 박물관의 심장부에 우뚝 서 있는 공룡의 뼈대를 보는 순간 어느 새 뼈대만 있는 공룡이 살집과 피부를 가진 살아있는 존재로 탈바꿈하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박물관 전시실은 중생대의 정글이 되어버려 금방이라도 포식자들을 피해 몸을 숨겨야 할 것 같은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허나 망상은 어디까지나 망상일 뿐이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천천히 동공을 열면 그저 고요한 공간 속에서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긴 존재들의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수억 년 동안 지구를 누비며 지배자로 군림한 존재들은 한 순간에 재가 되었고, 인간은 그저 아주 조금 남은 흔적을 통해 그들이 어떤 존재였고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기나긴 지구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역사는 지극히 짧고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존재들이 해내지 못한 것들을 해낸 유일한 존재이다. 설령 그것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존재들이 박제된 공간을 거닐면서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지구의 역사는 너무나도 경이롭고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불편함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다.












 살짝 무거워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자연사 박물관을 나와 잠시 걸었다. 프랑크푸르트는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닮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어느 거리나 예외는 없다. 고층의 빌딩과 아기자기하고 낮은 건물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다시 사라지는 광경이 수차례 반복된다. 이러한 시각적 현상을 여러 차례 겪으며 거리를 걷다보면 건물 크기가 아니라 내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정체불명의 약을 먹고 신체 크기의 변화를 겪는 것처럼. 그래서 나에게 프랑크푸르트는 이상한 나라 같은 곳이다. 압도하지만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고층 건물 중 가장 신기한 건물은 역시 유럽중앙은행과 메세 건물이다. 유로화 마크가 우뚝 서 있는 빌리 브란트 광장 앞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유럽중앙은행은 유럽 경제의 심장이자 뇌신경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전통적인 상업도시 이면서 동시에 유럽에서 가장 큰 공항이 있는 항공 허브인 만큼 베를린도 뮌헨도 아닌 프랑크푸르트가 독일을 넘어선 유럽의 금융 중심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파리의 친구들이 내가 프랑크푸르트에 간다고 하면 으레 ‘마리오 드라기라도 만나러 가는 거냐?’ 라는 질문을 하는 이유도 이러한 도시의 배경에서 연원한다. 금융 뿐 아니라 각종 상업 박람회(Messe)가 열리는 도시로도 유명한데, 프랑크푸르트를 지칭하는 별칭이 ‘International Messestadt(국제 박람회 도시)’인 것도 이 때문이다. 자연사 박물관을 가는 길에 보았던 메세 건물에는 Messe라는 독일어 알파벳이 매끈하게 박혀있었고, 잔디밭을 낀 건물은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풍당당 했다. 그리고 건물 앞에는 서울 역사박물관 앞에서 자주 보곤 했었던 조나단 보롭스키의 작품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 서 있다. 서울 역사박물관 근처는 곧잘 가 버릇했던 곳인지라 해머링 맨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조각을 다시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만나니 서울에 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살짝 반가움도 느껴진다. 허나 서울에서는 어쩐지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던 해머링 맨이 여기서는 그렇게 까지 쓸쓸해 보이지는 않는다. 둘 다 대도시의 거대한 고층빌딩 숲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는 바쁜 현대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똑같은’ 작품이지만 느낌은 사뭇 다르다. 서울에서는 고된 노동에 치여 피로의 극을 달리는 와중에도 노동을 강요받는 부품처럼 보이던 조각상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그냥 바빠 보이기만 할 뿐 서울의 그것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바쁘게 일상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상한 나라의 흰 토끼처럼 보일 뿐이다. 어쩐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프랑크푸르트를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하고 마인타워로 마지막 날의 발걸음을 옮겼다.












 마인 타워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이런 기분은 더 진한 색으로 짙어진다. 프랑크푸르트의 명물 중 하나인 마인 타워는 프랑크푸르트 및 주변 지역의 전경을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부터 마인 타워에 올라가고 싶었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친지라 주저 없이 올라갔다. 마인 타워에 올라가면 지상에서 프랑크푸르트를 볼 때와는 다른 의미로 ‘이상한 나라’가 펼쳐진다. 모든 것이 미니어처처럼 작아지는 하트 여왕의 궁전에서 출발해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들지만, 한편으로는 은행 건물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가깝게 다가와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프랑크푸르트가 의외로 크지 않다는 것과 프랑크푸르트 및 주변 지역에 녹지가 상당히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낮은 곳에서 보면 너무나도 분주해 보이는 고층 건물의 도시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단번에 평온한 녹지의 정원으로 탈바꿈한다. 난간에 기대어 작은 레고 같은 건축물들을 하나씩 헤아리다가 돌연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만져오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이 바쁘고 빠른 흰 토끼의 도시에서 이상한 나라 구경을 하는 앨리스가 되어 한가로이 넋을 놓고 있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다.















 떠날 시간이 되자 파랗게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운 회색으로 바뀌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인 타워를 내려와 잠시 뢰머 광장을 걸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작고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곳이자 동시에 가장 오래된 시청사가 있는 곳인 뢰머 광장. 전통 양식의 건물들과 고층 건물들이 대비되는 조화도 멋지지만, 다시 이 광장을 산책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나치의 사상 검열로 인해 1933년 5월 10일 수많은 사회과학과 철학 서적이 불태워졌음을 알리는 작은 표식이다. 이 때 수많은 책들이 불태워졌기에 프랑크푸르트 역시 전쟁의 포화를 피해갈 수 없었고, 결국 그로 인해 파괴된 프랑크푸르트가 지금과 같은 이상한 나라로 탄생한 것이다. 지금의 프랑크푸르트가 가진 이상한 나라 같은 부조화는 아픈 과거의 흔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허나 그러거나 말거나 마인 강은 예나 지금이나 조용하게 흐르며 지켜만 볼 뿐이다. 정말로 아쉽지만 이젠 안녕을 고해야 한다. 가깝지만 멀고 낯설지만 친근한 나라인 프랑크푸르트, 다음에 올 때는 더 즐겁게 놀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