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耽世 : 느끼다

[아미앵/20151125] 무거운 아름다움과 가벼운 순간




 11월 마지막 주에 모든 세미나가 휴강이 되었다. 지도교수님을 비롯해 연구소 동료들이 외부 학회에 참여하게 되어서 불가피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초보를 갓 벗어난 지라 딱히 어디 학회에 참여하지도 않고 공짜로 한 주의 휴가를 얻은 것은 나쁘지 않다. 작년 이맘때는 수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동적으로 슈투트가르트로 첫 여행을 떠났었는데, 올해는 뭐가 지나갔는지 짐작도 안 될 정도로 정신없는 11월을 보내다 뜻밖의 휴가를 맞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껏 맞은 모처럼의 휴가인데 집과 도서관만 드나들기엔 어쩐지 아쉬운 듯한 기분이 들어 결국 아미앵으로 가는 기차표를 구입했다. 파리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인지라 당일치기로 부담 없이 갔다 올 수 있는데다 그 유명한 아미앵 대성당의 명성을 익히 들은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미앵에 간 목적은 그저 대성당 하나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작 그런 건축물 하나를 보기 위해 기차를 타냐고 하는 사람들도 꽤 많겠지만, 건축과 미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나 중세사를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고작 성당 하나’가 아니다. 중세의 성당은 단순한 건축물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규합하고 도시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외부의 순례자들을 끌어 모으는 구심점이었다. 따라서 파리의 노트르담이든 랭스와 아미앵의 노트르담이든 일단 대성당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도시를 대변하고 그 부근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이끌던 정신적·물질적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물론 웅장한 건축이나 장식과 같은 외적인 면이 시선을 우선적으로 잡아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성당이 수행한 역할과 상징성을 고려하면서 대성당의 도시를 보는 것도 꽤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미앵은 건축과 도시의 성장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역에서 내려서 대성당으로 가는 길은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역사를 나오자마자 저 멀리 아미앵 대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한 눈에 시선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저 첨탑을 찾아 쭈욱 걷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리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느껴질 때 고개를 들면 멀리서 본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거대한 아미앵 대성당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딕 양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아미앵 대성당은 쾰른 대성당의 모델이 된 성당이다. 진짜 ‘원조’라 할 수 있겠다. 독일의 명장 루덴도르프가 그렇게나 아미앵을 원했던 것은 파리와 런던, 그리고 브뤼셀을 잇는 삼각지대 정 가운데라는 지리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장엄한 고딕 양식의 성당이 풍기는 아름다움에 매료된 면도 있을 것이라고 잠시 추측해본다.

















 12세기에 그 기반이 만들어지고 13세기에 본격적으로 축조되어 현재의 형태를 가지게 된 아미앵 대성당은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와 아름다움을 지닌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다. 파리, 랭스, 오를레앙에 있는 성당들보다도 훨씬 크고 복잡한 구조로 유명하다. 아미앵의 대성당을 보고 파리의 노트르담을 보면 아름답기는 하지만 작고 귀여운 미니어처 같다는 생각이 들고, 쾰른의 대성당을 보면 웅장하기는 하지만 섬세한 아름다움은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정도로 아미앵의 대성당은 규모면에서나 미적인 측면에서나 전혀 밀리지 않은 유럽 최고의 고딕 성당이다. 얼마 전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인 아드소의 기억에 붉은 성모의 형상으로 언급되는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과 달리 아미앵의 대성당은 하얗다. 허나 똑같은 하얀 성당이라도 깨끗한 우윳빛을 연상시키는 오를레앙의 대성당이나 상아색을 띠는 랭스의 대성당과는 달리 아미앵의 노트르담은 창백한 느낌을 주는 회색이 감도는 하얀색이다. 아마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돌의 재질이 다른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낯선 이방인의 눈에는 아름답지만 창백한 대성당의 전경과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풍경 속에 십자군 전쟁을 호소한 수수께끼의 은둔자가 비춰질 뿐이다. 대성당의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십자군의 광기는 역사의 한 장에 새겨진 글자로만 남고, 영광을 자랑하던 대성당의 도시 역시 철과 군화의 발길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세계 대전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대성당 내부의 벽만이 지난한 세기의 굴곡진 역사를 기억하며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아니 됨을 조용히 읊고 있을 뿐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어쩌면 역사의 풍화 속에 색이 바랜 채 도도히 현대를 버텨내고 있기에 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 한 때 성당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물감들은 전부 다 사라지고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흰 회벽만이 남았지만, 오히려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스치고 실내로 들어오는 순간 빛과 벽이 만나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더 극대화된다. 마치 정말로 햇빛을 통해 신의 존재가 구현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햇빛을 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머금은 대성당 내부는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이 나는 게, 요행히 아미앵의 대성당은 전란 속에서도 오롯이 그 형체를 지켜낼 수 있었지만 아미앵의 대성당을 모방한 쾰른 대성당은 그대로 포화에 그을려버렸다.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가 싶다.

















 대성당이 아미앵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대성당만이 아미앵의 전부가 아니다. 아미앵은 그 기원이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도시로 카이사르도 갈리아 원정 당시 들린 적이 있었던 도시이다. 지금도 이 부근에서는 계속해서 갈리아 시대의 켈트 족과 로마 유적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다. 아미앵은 중세에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도시이다. 십자군 전쟁을 촉발한 정서적 자극제를 제공했던 선동가 ‘은자 피에르’가 바로 이 아미앵 출신이다. 그러고 보면 연구 분야에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하는 선생님 한 분이 아미앵 출신이신데, 그 분의 최근 연구가 예언과 종말론이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머릿속에서 수식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피카르디 박물관에 가면 아미앵의 역사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다. 켈트부터 고딕, 그리고 세계 대전까지 기나긴 시간을 망라하는 도시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전시되어 있다. 소장품들은 역사학 및 고고학적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정말 하나하나가 다 ‘아름다운 피조물’이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미적 측면도 훌륭하다. 파리에서 내로라하는 수많은 박물관과 전시를 본 나의 눈에도 아미앵의 예술품들과 박물관 건축은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고딕과 미술의 도시’라는 호칭이 결코 아깝지 않다. 파리와 그리 멀지는 않지만 파리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과 매력이 있다. 날씨는 칙칙해도 그 칙칙함을 넘어서는 무거운 아름다움이 바로 아미앵의 아름다움이다.















 아미앵은 운하의 도시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솜 강변의 수로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면서 상업으로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일찍이 운하 거리가 형성되었다. 이 운하거리는 지금까지도 생루(Saint Leu)라는 이름으로 남아 도시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다. 밤베르크나 베네치아의 운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지도 않고 그만큼 규모가 크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가의 풍경과 전통적인 건물에서 풍기는 운치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운하 바로 옆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대성당이 화려하고 육중한 몸집을 뽐내며 지상의 존재들을 내려다보는 지라 상대적으로 작은 운하와 건물들이 아주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느껴진다. 그 옛날 대성당을 보러온 순례자들을 상대로 먹고 살기 위해 이곳에 처음 자리 잡은 사람들 역시 대성당을 보며 성모가 현세의 고단한 삶을 보살펴 주리라 생각하고 그들만의 소소한 일상을 이어갔을 것이다.












 하룻밤이라 생각했던 밤은 어느새 천년의 밤이 되었고 모든 건물들이 잠에 빠질 때 나는 파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미앵 역 헌사 된 테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꽃다발들과, ‘파리와 베이루트와 모두를 위해 기도한다.’는 문구가 몽롱하게 과거의 환상에 빠진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