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耽世 : 느끼다

[프랑크푸르트/20151001-08] 미술관에서의 재회




 한 3일 가량을 숲 속 깊은 곳에 있다 보니 슬슬 지겨워지면서 숲이 으스스해지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론 바다든 호수든 숲이든 자연을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연을 구경하고 즐기는 대상으로써 좋아하는 것에 한정된 것이지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다. 이유야 어쨌건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콘크리트의 아이들 중 하나이고 지금은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파리에 살고 있다. 아무리 내가 파리 생활이 힘들고 모국어를 벗어나 학업을 하는 것에 피로를 느낀다 하여도 어쨌든 나는 도시의 자식이다. 아마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 정말로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지 않는 한 내가 시골 생활을 할 일은 없음을 3일 동안 베르트하임에 있으면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본래 고층 빌딩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프랑크푸르트 고층 빌딩 숲의 실루엣이 보였을 때 얼마나 안도감이 들던지.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금융가의 고층 빌딩들을 보며 환호한 순간이었다.








 다시 만난 프랑크푸르트는 2월에 처음 만났을 때의 첫인상이랑 큰 차이가 없는 도시였다. 여전히 고층 빌딩 숲과 마인 강이 도시를 감싸고 있고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증권가를 지나다닌다. 아샤펜부르크와 베르트하임이 숲 속 나무들 사이로 빨간 모자와 백설 공주가 지나다닐 것 같은 곳이라면, 프랑크푸르트는 깜빡 잠이 든 앨리스가 우연히 조우하게 된 이상한 나라 같다. 쭉쭉 뻗어 하늘로 향하는 거대한 고층 빌딩들과 아기자기하고 예쁜 마인 강변의 뢰머 광장을 번갈아 마주하고 있노라면 내가 몸이 저절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앨리스가 된 것 같고, 양복을 입은 채 바쁘게 돌아다니는 증권가 사람들은 꼭 연미복을 빼입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흰 토끼들을 연상시킨다. 우습지만 그렇다. 프랑크푸르트에 올 때마다 그런 인상을 받는 것 같다. 파리에서는 그저 인상을 찌푸린 채 수업을 듣고 거리를 걷는 검은 머리의 외국인이지만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으면 또 다른 의미의 이방인이 된다. 슈투트가르트에서는 헤겔과 헤세를 만나고, 바이에른에서는 동화와 중세의 환영을 보고,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다.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여행을 가고자 하는 욕구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장소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변이함으로써 꾸미지 않은 나 자신과 직접적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성장한다. 여행은 가장 좋은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스승이다.


 프랑크푸르트와 반갑게 재회를 하고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한 후 천천히 마인 강을 산책하며 슈태델 미술관으로 향했다. 줄곧 가고 싶었던 미술관 중 하나이지만 지난번에 프랑크푸르트에 왔을 때는 카니발 행렬을 구경하느라 아쉽게도 기회를 놓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슈태델 미술관을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왔고, 행여 기회를 놓칠까봐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슈태델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슈태델 미술관은 마인 강 남쪽의 샤우마인카이(Shaumainkai)라 불리는 강변길을 따라 형성된 박물관 단지에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 섬을 뜻하는 독일어 무제움인젤(Museuminsel)은 보통 베를린의 박물관 섬이나 뒤셀도르프 근처의 현대미술관 단지인 홈브로이히 섬을 칭하는 말로 알려져 있는데 프랑크푸르트에도 이들 못지않은 박물관 단지가 있다. 슈태델 미술관을 비롯해 건축박물관, 역사박물관, 예술사박물관, 영화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이 마인강변을 수놓으며 프랑크푸르트의 박물관 섬을 형성하고 있다. 거대한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금융의 도시이지만, 한편으로는 괴테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다운 문화적 면모가 강하게 돋보인다. 프랑크푸르트가 전쟁을 겪고 현대적인 고층 건물의 숲으로 다시 태어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잃었다’는 오명을 듣지 않는 것은 이 같은 문화적 자양분 덕분이 아닐까 싶다.





 슈태델 미술관은 독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미술관이다. 특히 회화 부분에서는 세계 예술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안은 생각보다 아늑하고 고요하지만 절대 사람을 옥죄지 않는 은은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바깥보다는 안이 훨씬 더 멋진 미술관이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회화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가장 먼저 괴테가 편안한 자세로 관객들을 환영한다. 워낙에 유명한 작가인데다 과학, 미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당대의 셀러브리티 인지라 많은 화가들이 괴테의 모습을 초상으로 남겼는데, 그래도 역시 그 중 단연 걸작으로 꼽힐만한 초상은 슈태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빌헬름 티쉬바인의 작품이다. 헤센 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하이나의 화가 가정에서 태어난 티쉬바인은 일찍이 초상화가로써의 재능을 인정받았고 괴테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유명세를 얻게 된다. 초상화 속의 괴테는 젊지만 적지 않은 나이이고 충분한 안정감을 지니고 있다. 아마 그가 작가로써 명성을 얻고 바이마르의 재상을 지내다 돌연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날 시기에 그려진 초상이기 때문이리라. 인물 뒤편의 배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폐허와 풍경은 을씨년스럽지 그지없지만 낡은 소파에 걸터앉아있는 괴테의 표정에선 굳은 우수와 편안한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명예와 부를 모두 거머쥔 거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생의 새로운 궤도를 찾아 평생을 여행한 여행자였던 괴테. 지금은 시대와 동떨어진 고전이라는 평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를 단순히 운 좋게 좋은 집에서 태어난 작가로만 치부할 수 없는 건 그의 이 같은 행적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괴테라는 천재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지녔던 당시의 프랑크푸르트가 조금 부럽기도 하고 말이다.






 괴테의 초상 외에도 슈태델 미술관은 명성이 아깝지 않은 곳이다. 파리에서는 보기 힘든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그림도 상당수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두 개의 캔버스로 나눠진 햄릿과 오필리아의 초상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서구 세계에서는 질릴 정도로 소비와 재생산을 반복하는 고전적 클리셰이다. 그러니 전원과 고전으로의 회귀를 예술의 궁극적 종착지로 설정한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이를 그냥 두었을 리 만무하다. 강력하고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흐릿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캔버스와 캔버스 사이의 벽에 가로막혀 위태로운 표정으로 상대방을 응시하는 연인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긴박함을 동시에 느끼도록 유도한다. 두 개의 캔버스로 나눠서 연인의 모습을 묘사한 작가의 탁월한 구도 감각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름이 알려진 것에 비해 프랑크푸르트는 생각 외로 작은 도시이다. 인구는 50만이 조금 넘고 도시 면적도 그다지 큰 편이 아니다. 한국인들에게 프랑크푸르트가 다른 독일의 도시들에 비해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주인공인 하이디의 친구 클라라의 고향이자 하이디에게 우울증과 향수병을 짊어지게 한 삭막한 도시가 프랑크푸르트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안네의 일기’를 남긴 비극적인 역사의 주인공인 안네 프랑크 역시 프랑크푸르트 출신이고, 거의 모든 독일행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더 사람들 뇌리에는 다른 도시 이름보다 프랑크푸르트라는 이름이 강하게 각인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유럽 중앙은행이 있는 도시라는 점도 크게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는 꽤 멋진 도시이다. 마인 강가의 정취와 수많은 박물관, 미술관이라는 문화적 인프라가 돋보인다. 슈태델 미술관은 미술관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가 지닌 문화적 자산을 돋보이게 해주고 마인 강의 운치를 더해주는 건물이다. 슈태델 미술관의 창을 통해 프랑크푸르트의 금융가를 바라보면 역시 천재를 거장으로 키워내기 위해선 물질적 자산과 문화적 자산이 모두 갖춰줘야 한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된다.






 슈태델 미술관을 나온 나는 계속 산책을 했다. 콘트리트로 가득한 회색의 도시를 뭐가 좋다고 걸어 다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생각 외로 프랑크푸르트는 보행자에게 꽤 따뜻한 도시이다. 들쑥날쑥한 건물 크기의 변주와 은은한 강가의 풍경이 주는 고요한 변주는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다시 만난 프랑크푸르트는 한적한 가을의 양복을 입은 채 ‘어서 오라’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