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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프랑크푸르트/20151217-20160103] 이상한 나라의 겨울


 두 달이 조금 넘는 간격을 두고 나는 프랑크푸르트와 재회했다. 지난번에는 여행의 종착점이었던 프랑크푸르트지만, 이번에는 여행을 시작하는 곳으로서 프랑크푸르트와 재회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아 나를 반겨준 프랑크푸르트는 나의 세 번째 프랑크푸르트인 것이다. 사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내에선 가장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안 나고, 오히려 크리스마스에도 차분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라고 평해지는 도시이다. 아무래도 회사들이 많고 특히 금융이 주력인 도시니까 그럴 법도 하다. 게다가 크리스마스와 각종 종교 행사를 중요시하는 카톨릭과 달리 소박하고 조용하게 연말연시를 보내는 것을 중시하는 신교가 우세인 지역이라서 더욱 그런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프랑크푸르트를 크리스마스 여행의 첫 관문으로 택한 건, 프랑크푸르트가 다른 도시로 가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는 교통의 중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끔찍한 비극을 겪고 침울함에 잠겨있던 파리를 떠나 머리를 식히고 싶다는 바램도 한 몫 했다. 결국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로 인해 나의 첫 크리스마스 여행을 여는 장소는 프랑크푸르트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는 내게 있어 꽤 큰 의미를 지니는 도시이다. 물론 내 삶의 새로운 2막은 파리에서 시작되었지만, 파리에 사는 나에게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부여한 도시는 프랑크푸르트이다. 첫 여행지이던 슈투트가르트, 처음 크리스마스를 맞은 쾰른, 그리고 겨울의 끝자락에 슬럼프를 해소하고 다시 나아가도록 재충전하게 해 준 프랑크푸르트. 아마 이 세 도시가 나의 파리 생활에 있어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해준 도시들이 아닐까 싶다. 특히 프랑크푸르트는 나의 타지생활에 있어 긍정적인 의미의 전환점을 제공해준 도시이다. 2015년 2월,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왔을 때 나는 슬럼프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정신없이 파리에서의 첫 해를 넘기고 물리적으로는 안정을 향해가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수세에 몰리면서 공부도 숨쉬기도 하기 싫어지는 최악의 슬럼프를 겪으며 스트레스성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중 프랑스 국영 철도청 SNCF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할인 프로모션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주저 없이 티켓을 끊고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었다. 그리고 겨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창한 날, 마인 강가를 걷고 카니발 구경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파리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프랑크푸르트에 대한 인상은 꽤나 강렬하면서도 편안하게 남아있다. 고층건물과 아담한 구시가지가 교차하는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같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놓고 슬럼프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라는 느낌이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크리스마스에도 가장 차분하고 들뜨지 않은 도시라고 하니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장소가 있을까. 내가 세 번이라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발걸음을 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파리에서 약 4시간을 고속열차로 달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내리니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와 역사가 나를 반겼다. 연휴 전야라 그런지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은 기차를 타고, 내리고, 기다리는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나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은 독일 뿐 아니라 유럽의 주요도시들을 잇는 철로망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붐빌 수밖에 없다. 역사를 가득 수놓고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보다도 각자의 여정을 위해 역을 지나치는 인파들에서 비로소 연휴가 코앞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프랑크푸르트가 가지는 특유의 바쁜 느낌이 외려 안도감을 준다. 군중속의 외로움을 설파한 어느 철학자의 말을 뒤집어보면, 오히려 군중 속으로 들어가야만 완전하게 혼자가 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프랑크푸르트의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 유명한 현대 사회학과 미학, 철학의 거두인 '프랑크푸르트학파'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파리는 거대하고 화려하고 외롭지만 고독하진 않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는 매우 바쁘면서 조용하고 고독하다. 모두가 들떠서 두근거리는 연휴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프랑크푸르트는 안성맞춤이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탔지만 도착하니 어느 새 오후가 되어있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천천히 산책을 시작해서 시내까지 걸어갔다. 시내에는 내가 프랑크푸르트에 올 때 마다 항상 들리는 레스토랑이 있다. 독일에서 유명한 백화점 체인인 갤러리아 카우프호프의 푸드코트인데 여느 백화점 푸드코트가 그렇듯 딱히 뭔가 대단한 메뉴나 별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한 저렴한 가격의 음식점일 뿐이다. 하지만 이곳으로 매번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경치. 시내 한가운데의 높은 곳에서 시내 전체와 스카이라인을 관망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장소의 가장 큰 매력이다. 낮은 곳에서는 멀리서 걸어오는 거인들처럼 보이는 마천루들이 이곳에서는 가깝고 친근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거리감도 훨씬 줄어든 데다 동등한 눈높이에서 건물들의 선을 볼 수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혹자는 프랑크푸르트를 지루하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라고 하지만 나는 꽤 이 도시를 좋아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지루하고 답답하다'는 의견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 이곳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양복차림으로 바쁘게 증권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히 딱딱하고 숨 막히는 느낌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높은 테라스에 앉아 한없이 스카이라인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프랑크푸르트는 상당히 시원시원하고 편안한 도시이다. 바쁘게 일과를 보내는 사람들 한 가운데에서 느긋하게 앉아 도시의 지붕들을 따라 그려진 선을 감상한다는 것은 커다란 사치이다. 어쩌면 이런 소소한 사치를 누리려 프랑크푸르트에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프랑크푸르트는 관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도시는 아니지만 군중 속에 섞여 고독과 평온을 찾기엔 가장 이상적인 도시이다.


















 한숨 돌리고 스카이라인과 재회하는 시간을 가진 후 천천히 시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독일은 유럽 내에서도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유명한 도시인데, 프랑크푸르트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단지 크리스마스 마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것이 특징일 뿐이다. 프랑크푸르트 크리스마스 마켓은 시내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하웁트바헤(Hauptwache)에서 시작해 시청사 앞 뢰머 광장, 그리고 마인 강변까지 이어진다. 재밌는 것은 지금 프랑크푸르트 시내의 상징이자 가장 붐비는 레스토랑 겸 카페인 하웁트바헤가 과거에는 죄수들을 가둬놓는 감옥이자 프랑크푸르트의 치안 및 각종 범죄를 관할하는 파출소였단 사실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건물의 용도도 변하고, 하웁트바헤는 관광안내소 및 백화점 한 가운데에 위치한 레스토랑이 되었다. 더불어 이제 하웁트바헤는 크리스마스 마켓의 한 가운데에서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조용히 도시의 역사를 속삭여주는 길쭉한 거인이기도 하다. 짐작컨대 과거에는 하웁트바헤 앞엔 크리스마스가 없었을 것이다. 마인 강가와 시청사인 뢰머 광장 앞이 전부였을 것이고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하웁트바헤 근처가 시내가 되면서 확장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숨겨진 이야기들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인파를 헤치며 크리스마스 마켓을 가로질러 산책을 했다. 하웁트바헤부터 구 시청사인 뢰머 광장을 거쳐 마인 강변까지 천천히 걸었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라는 인상을 주는 프랑크푸르트의 시가 풍경은 크리스마스 장식과 함께 빛나는 건물들 때문인지 더더욱 신비롭고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고층건물과 인파는 여전하지만, 한편으로는 동화속의 마을처럼 빛나는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크리스마스 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하고 들뜨지 않은 분위기가 오묘하게 겹쳐 역설적인 몽환을 만들어낸다. 물론 다른 도시들과 달리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머그잔과 음식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정장 차림인 것도 오묘한 느낌을 더하는 데에 큰 몫을 하긴 한다. 고층건물과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교차하는 곳에서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을 구경하며 마시는 사과 와인은 꽤나 향긋했다.










 정신없이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다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어둠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새 태양이 떨어지고 마인 강 위에도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12월이라 그런지 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어둠속에 빛나는 도시의 풍경에 매료되어 마인 강가에 걸터앉았다. 10월에 방문했을 때는 그래도 아직 따스함이 남아있었는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는 완연한 회색의 겨울 도시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밤의 프랑크푸르트는 새카맣고 반짝 거린다. 고요하게 어둠을 삼킨 마인 강가가 도시의 빛과 만나 반짝이는 그 모습은 매번 봐도 사람을 매료시킨다. 프랑크푸르트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낮의 프랑크푸르트도 꽤 멋지지만, 밤의 프랑크푸르트는 조용하게 잠이 든 사람들의 숨결과 대도시의 밤을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오묘한 인상을 준다. 사람들이 바쁘게 일을 하는 장소는 닫히고 크리스마스의 북적이는 소리도 멀어지는 다리 위에서,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반짝이는 도시의 밤과 진한 재회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은 테러의 상흔이 가시지 않아 우중충한 도시를 떠나 인파 속으로 숨어 고요함에 잠겨버렸다. 손에 들린 사과 와인 머그잔이 찬바람을 맞아 식어버릴 때까지도 도시는 강가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