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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르아브르/20150327] 가장 부드러운 색 회색, 그리고 가장 포근한 푸른색

 

 

 

 

 

 

 

 음산하고 무겁지만 아름다운 루앙을 뒤로 하고 내가 간 곳은 르아브르(Le Havre)였다. 사실 원래는 노르망디의 바다를 보고 싶었지만, 작은 어촌에서 하루를 다 보내기는 뭔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 만에 두 도시를 당일치기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것이다. 물론 이는 내가 루앙에서 르 아브르로 가는 기차를 놓침으로써 장렬하게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목적인 ‘바다 보기’는 이루었으므로 아쉽진 않다. 단지 생각보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노르망디 바다의 야경을 충분히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2차 세계대전 때 거의 다 파괴되고 재건한 도시인지라 확실히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 외에는 산업도시인지라 별로 볼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나 르아브르에 가고 싶었고 꼭 그곳에서 노르망디의 바다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르아브르에 왔고,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도시는 깨끗하고 조용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노르망디의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도시 전체에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음산하거나 으스스하지는 않았다. 북쪽의 차가운 바다인지라 거칠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탁 트이고 시원한 전경이 마음속까지 상쾌하게 해준다.


 르아브르는 훌륭한 역사적 건물이나 근사하고 큰 미술관이 있는 곳은 아니다. 해안을 따라서 리조트들이 들어서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모나코나 니스, 프로방스의 해변이 지닌 부유하고 럭셔리한 느낌은 다소 없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 없이 바다의 성격 자체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두 바다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순 없으리라. 변덕스럽지만 풍요로워서 수많은 문명의 젖줄이자 혈관이었던 따뜻한 바다 지중해와, 문명이 아직 닿지 않은 북방을 향해 열려있는 차가운 온도를 지님과 동시에 나치에게서 프랑스를 해방하도록 허한 장엄함이 있는 노르망디의 바다는 확실히 다르다. 몸을 시리게 하는 서늘함이 서려있는 무거운 바다인 것이다. 바람 역시 차갑기 이를 데가 없었고.

 

 

 

 

 

 


 그러나 그렇기에 르아브르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걷는 걸음마다 바다의 냄새가 짙게 밀려들어와 후각 세포를 자극하는 그 느낌이 너무나도 좋았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특유의 냄새와 차가운 공기가 섞여서, 후각도 촉각도 아닌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기묘한 감각은 거대한 대류처럼 르아브르의 대기 곳곳을 휘감으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자칫 잘못하면 감기에 걸릴 것만 같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코트의 깃을 여미고 목도리의 매듭을 하나 더 짓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묘한 감각이 건네는 인사를 거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항구에 조용히 정박한 배들은 얌전하게 숨을 쉬면서 몸을 펼 준비를 하고 있다. 조용하게 쉬고 있는 그들을 깨울 생각은 없었지만, 그 쪽에서도 딱히 예고없이 들이닥친 방문자를 거절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대하던 야경은 보지 못했지만 해 질 무렵의 풍경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늘은 마치 회색과 파란색의 그라데이션으로 이루어진 이름 모를 화학의 마법 같은데, 해가 떨어지면서 그 물감들 위로 빨간색 잉크가 번지는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어서 그 색채의 향연들이 투명한 물위로 반사되면서 해안가 전체를 삼키는 순간, 보고 있는 사람의 숨도 단번에 넘어가는 광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 채 차가운 북쪽의 바다에 휩쓸려가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은 시원함이 인간을 감싸 안는다. 잿빛과 푸른빛이 한데 뒤엉킨 도시에 어둠이 어슴푸레하게 가라앉고, 그 위로 점점이 불빛들이 동동 떠다니는 모습은 신비롭기 이를 데 없다. 도시 곳곳에는 바다의 냄새와 물의 향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지만, 싸늘하고 무섭기는커녕 상쾌하고 안락하게 방문자를 환영해준다. 파리로 돌아가기 위해 역으로 향하는 트램 속에서, 내내 창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상쾌한 만큼 아쉬웠던 노르망디의 바다에 꼭 다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