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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오를레앙/20150321] 로아르 지방의 성처녀, 오를레앙을 다녀오다

 주말 여행지를 선정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선택장애를 불러일으키는 딜레마이다. 당일치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가고 싶은 곳’보다는 ‘가깝고 교통비가 덜 드는 곳’을 우선 조건으로 설정하게 되고, 그만큼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할 날짜에 날씨 역시 많이 보게 된다. 비오는 날 홀로 거리를 걷는 것 역시 나쁘지는 않지만, 세찬 바람이 빗방울을 튀길 때의 여행이란 유쾌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 쾰른과 암스테르담에서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를레앙 역시 이와 같은 이유로 선정이 된 주말 여행지이다. 지난 주 주말에는 비가 오는 지역이 상당히 많았고, 루앙과 오를레앙 중에 갈등하던 내 마음은 루앙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자마자 바로 오를레앙으로 기울어버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를레앙으로 가는 열차표를 끊었다.

 

 

 

 

 

 오를레앙은 파리에서 고속 열차로 약 1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도시이다. 프랑스 중부의 로아르(Loire) 지방의 중심도시로, 유명한 성녀이자 전사인 잔 다르크(Jeanne D'Arc)가 계시를 받고 영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곳이기도 하다.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스테를리츠(Auterlitz)역에서 열차를 타야 하는데, 오스테를리츠는 나폴레옹이 승리를 거둔 곳이다. 우연의 이름이 얄궂게도 나폴레옹의 승전지와 잔다르크의 승전지를 오가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파리 북역 에서 출발하는 유로스타가 런던 워털루(Waterloo)역에 정착했는데, 워털루가 나폴레옹의 패전지인지라 프랑스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 지금은 유로스타가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에 정착한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역 이름 하나에 국민감정이나 지역감정이 실리는 것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오를레앙에 갈 때 날씨가 안 좋다고 해서 걱정을 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오를레앙 역에서 내려 쭉 뻗은 일자형의 도로 너머에, 말을 타고 달려가는 형상의 동상이 얼핏 보였다. 흐릿하지만 구름과 햇빛이 적절한 비중으로 섞여있어 나쁘지는 않은 날씨였고 시야는 아주 맑은 편이었다. 나는 미술의 원거리 소실점마냥 한 곳으로 모이는 점에 자리 잡은 그 동상이 잔 다르크의 동상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한가로운 거리와 고풍스러운 돌담길은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따스한 햇볕을 받자 보다 짙고 우아한 풍미를 드러냈고, 그 돌담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전차의 모습 역시 평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오를레앙의 중심가를 걷자 나는 광장과 마주쳤다. 바로 잔 다르크를 기념하는 광장이자 로마의 기독교 탄압에 맞서 순교한 초기 기독교의 성자들을 기리는 마르트루아(Martroi : 순교자를 의미하는 martyrs의 라틴어) 광장, 그것이 내가 처음 마주한 오를레앙의 얼굴이었다.

 

 

 

 

 

 

 오를레앙의 광장 한 가운데에는 위풍당당한 잔 다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오를레앙은 잔 다르크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잔 다르크가 처음으로 신의 계시를 받고 영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를레앙은 곧 잔 다르크의 도시이고,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의 상징이다.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전쟁 전면에 나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외에도, 잔 다르크가 프랑스에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만약 잔 다르크가 없었더라면 그대로 프랑스가 영국의 치하에 들어갔을 것이고,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진행되었을 테니 말이다. 광장의 이름이 순교자라는 것과, 잔 다르크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이 왠지 기묘하게 맞물려 떨어진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사람들과, 신의 계시를 받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 바쳤지만 누명을 쓰고 화형당한 여전사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겹쳐진다. 나는 무신론자 이지만 광장에 서있노라니 저절로 엄숙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허나 그러거나 말거나, 광장 앞의 회전목마는 공기를 가르고 유유히 돌아가고 광장에는 아이들과 젊은 부모들의 웃음소리가 흩날린다.

 

 

 

 

 

 

 

 

 오를레앙이 잔 다르크의 도시라는 것은 오를레앙의 가장 번화한 중심가의 이름에 ‘잔 다르크’의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도로명 주소를 기본으로 하는 유럽에선 가장 큰 거리의 이름을 보고 그 도시의 역사나 중요한 인물들을 대충 알 수 있다. 오를레앙의 잔 다르크 거리가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마르투아 광장을 떠나 잔 다르크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거리의 끝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웅장한 대성당이 보인다. 돌길에는 트램이 오가고, 사람들과 자동차와 유모차가 지나다닌다. 간간히 자전거도 지나다니지만 파리나 암스테르담보다는 자전거가 드문 편이다. 거리는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트램이 안 다닐 때에는 마치 이 도시에 보이지 않는 요정들만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트램이 지나다니면 마치 고요한 우주의 외딴 행성의 시골마을에 온 것 같다.

 

 

 

 

 

 

 

 

 

 

 

 

 

 잔 다르크 거리는 꽤 길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은 거리 끝의 대성당에 이르려면 꽤 많이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 걷는 순간마저도 그저 즐겁다. 고풍스러운 거리를 둘러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내가 과거의 거리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착각 속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 새 성당이 나를 반긴다. 사실 누구 말마따나 성당이나 교회 건축은 이제 ‘질릴 때’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파리에 온 이후 꽤 많은 도시에서 대성당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롭다. 얼핏 보기에는 다 똑같아만 보이는 성당 건축들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각 건축이 가지는 고유의 개성과, 건축이 서 있는 장소와 어우러지는 개개의 독특함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쾰른의 대성당이 그로테스크하고 우울하지만 섬세하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왕의 위엄을 지녔고, 트루아의 대성당이 정갈하지만 화사한 백합 같았고,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이 붉은 장미 같았다면 오를레앙의 대성당은 그 어떤 성당들보다도 ‘우아하다’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렸다. 크기가 상당했지만 쾰른이나 스트라스부르의 성당처럼 웅장하다는 느낌보다는 우아하고 기품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하지만 그 우아함은 파리나 트루아의 성당처럼 ‘지배자’의 위엄이 느껴지는 우아함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더 여성스럽고 순수해서 절대 더럽혀지면 안 될 것만 같은 강박관념을 주는 우아함이다. 어쩌면 이 성당은 잔 다르크를 형상화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우아함이다. 게다가 성당의 전면과 후면, 측면이 완전히 다른 것도 아주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잔 다르크 광장에서 바라보는 성당의 전면은 마치 순결한 처녀 같고, 조금 비틀어 돌아가서 측면을 보면 성당이라기보다는 우아한 궁전의 느낌을 주고, 다시 광장 뒤편에 자리 잡은 대주교의 정원에 가서 성당의 후면을 보면 평화로운 정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한참을 성당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시내 주변에 흩어진 건물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거리 하나하나에서 고풍스러운 우아함이 풍겨져 나온다. 호기심이 발동하여서 거리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탑이 있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아쉽게도 자세하게 구경을 하기는 힘들었지만 설명을 통해 이 탑이 과거 오를레앙의 초소 역할을 한 탑임을 알 수 있었다. 프랑스는 주변국들보다 먼저 중앙집권을 시도하면서 지방 봉건 귀족들의 권한을 해체시키고 궁정으로 편입하기 위해 장원의 성벽 경계를 허물어버린 나라이다. 그러한 이유로 오를레앙 역시 성벽이 없다. 하지만 성벽을 허물기 이전 중세 시대에는 장원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이 있었을 것이고, 또 이를 보조하기 위해 외부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초소가 필요했다. 오를레앙의 고풍스럽고 아늑한 시가지 속에 불쑥 솟은 것 같은 탑은 프랑스가 중앙집권화가 되기 이전의 흔적인 것이다.

 

 

 

 

 

 

 

 

 

 

 

 

 

 

 탑 부근에는 한 눈에 봐도 유서 깊고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석조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오를레앙 최초의 르네상스식 관저로 과거에는 시청사로 쓰였지만, 지금은 오를레앙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고고역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의 오를레앙은 잔 다르크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오를레앙의 기원은 멀리 로마 시대까지 올라간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이후 로마인들의 정착촌이 대량으로 형성되고, 이에 따라 토착민이던 갈리아의 켈트인들 역시 로마화 되면서 로마령 속주 갈리아가 만들어진 것이다. 오를레앙은 로아르 강가에 자리 잡은 내륙 항구 겸 곡창지로서 번영하게 되고,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프랑스 내륙의 중심이자 교통망의 요지로써 번영하게 된다. 박물관 내부에 전시되어있는 수많은 켈트의 청동기 유물과 로마의 유물들, 그리고 중세 이후에 나타나는 화려한 미술품들은 오를레앙이 그만큼 프랑스 사에서 중요한 도시임을 나타내주는 증거이다.

 

 

 

 

 

 

 

 

 

 

 

 

 

 

 

 

 

 

 

 오를레앙은 백년전쟁 당시 막강한 부르고뉴에 반기를 들고 영국군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한 도시이기도 하다.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영국군을 물리치고 국왕을 호위하여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해낸 성녀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승리를 거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오를레앙은 1429년 5월, 잔 다르크에 의해서 해방된다. 이를 기리기 위해서 지금도 오를레앙에선 매년 5월 7, 8일에 성대한 축제를 거행한다. 고고역사 박물관과 구 시청사에 잔 다르크만을 위한 관련 전시관이나 유물들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시내 중심의 마르투아 광장에 잔 다르크의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를레앙은 잔 다르크에 의해 살아난 도시이고, 잔 다르크는 451년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서 마을을 구한 성인 에낭과 함께 오를레앙을 지키는 대표적인 수호성인 것이다. 오를레앙은 잔 다르크의 도시이다. 잔 다르크가 없었으면 지금의 오를레앙은 없었을 것이고, 또 오를레앙이 아니었다면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고 승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오를레앙 미술관은 고고역사박물관 티켓이 있으면 무료 관람이라 하기에 별 생각 없이 들어갔지만 오히려 기대 안한 만큼 기대 이상이었다. 근대 이후의 예술품들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인데, 작품 하나하나가 풍기는 독특한 아우라와 조용한 분위기가 압권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단연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예전에 신화 관련 책을 읽다가 책 삽화에서 보고 충격을 받은 작품이었는데, 오를레앙에 와서 실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떠나는 오이디푸스, 자결한 이오카스테의 시신과 그들을 둘러싸고 오열하거나 혹은 오이디푸스에게 분노를 퍼붓는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의 시신을 처량하게 응시하는 한편 체념하고 아버지를 부축하며 떠나는 안티고네의 쓸쓸한 모습. 모든 것이 한 화면 안에 담기면서 인간의 비참한 운명에 대한 숙연함을 연출한다. 어머니의 시신을 애처롭게 보는 한편 묵묵히 운명에 순응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아버지를 지키는 안티고네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약해보이지만 강한 의지와 힘이 느껴진다. 제약이 많은 여성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성난 사람들로부터 아버지를 보호해 떠나는 일이 전부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지키고 나중에는 왕명을 어기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그녀는 고대 사회의 진정한 여장부이자 인간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임이 틀림없다.

 

 

 

 

 

 

 

 

 

 오를레앙은 야경도 멋진 도시이다. 특히 로아르 강가에 어둠이 내리고 그 까만 어둠 위에 불빛이 진주처럼 떠다니는 풍경이 아주 절경이다. 먼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로아르 강을 건넜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안고 있는 로아르 강을 보면서 감상에 젖어든다.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든, 강물은 항상 도도하게 그 자태를 뽐내며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흘러간다. 잔 다르크의 승리도, 종교전쟁도, 성 바르톨레미 축일의 학살도,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의 폭격도. 인간의 기억 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때로는 잊혀 지기도 하다 때로는 전설이 되어버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자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 어둠이 새카맣게 깔린 로아르 강 위에는 불빛이 진주처럼 내려앉았고, 고풍스러운 돌다리와 주변의 풍경이 그대로 물가에 비치면서 아름다운 정취에 운치를 더해준다. 그냥 그대로 강변을 걷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리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택한 여행지인데, 상상 외로 너무 아름다운 지역이라서 만족스러운 일일 여행이었다. 게다가 멋진 풍광 속에서 잔 다르크와 안티고네 같이 강한 의지와 실천력을 가진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흰색의 레이스처럼 아름다운 대성당과, 대성당의 자태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거리와 로아르 강가, 그리고 대성당에서 풍기는 강한 기운을 형상화한 것 같은 멋진 여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로아르 지방의 중심도시 오를레앙. 파리가 단색의 옷을 입은 자연스럽고 세련된 도시 여성이라면, 오를레앙은 고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강하고 인습타파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