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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랭스/20150709] 자연의 선물과 왕들의 흔적

 파리 동쪽에 위치한 샹파뉴 지방은 샴페인 와인으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그도 그럴 것 없이 이 지역의 특산인 탄산 와인 샹파뉴를 영어로 읽으면 샴페인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탄산이 들어간 와인만이 이 지역의 전부가 아니다. 물론 예로부터 와인과 미식으로도 유명한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탄탄한 농업과 상업을 기반으로 번영하여 중세 프랑스에 전성기를 구가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중세의 샹파뉴 백작은 프랑스 왕보다도 더 강한 권력과 재력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베네치아와 협력해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 후 프랑스가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도 이 지역의 농업과 상업은 큰 역할을 한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생기는 데에 아주 중요한 물질적 태반을 제공한 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세 샹파뉴의 수도는 지난 3월에 잠시 방문했었던 트루아 이다. 트루아는 샹파뉴 백작의 본부를 두고 매년 6월에 정기시가 열렸던 지라 중세 샹파뉴의 정치 및 경제 수도 역할을 했었고, 프랑스 왕을 능가하는 권위를 지닌 샹파뉴 백작의 과시가 건축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반면 랭스는 ‘왕들의 도시’이다. 프랑스인들은 랭스를 ‘왕들의 도시’라고 부르는데, 이 장엄한 명칭은 대성당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대성당에서 역대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하고 왕으로 즉위했음을 선포했기 때문에 랭스는 자연히 ‘왕들의 도시’가 되었다. 둘 다 샹파뉴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도시들이지만 도시가 함축하고 있는 시대와 의미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트루아가 샹파뉴 백작과 샹파뉴 상인들을 대표하는 도시라면, 랭스는 왕들과 중앙집권화 된 국가로써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따라서 샹파뉴는 중세 프랑스를 만들어낸 곳임과 동시에 중세 프랑스의 막을 내리고 중앙집권 프랑스를 탄생시킨 곳이라는 점에서 프랑스 역사의 중요한 장을 써내려간 지방이라 할 수 있겠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놀라울 정도로 평면적이다.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에도 산이나 언덕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완벽한 평지의 풍경에 꽤 충격을 받았었는데, 샹파뉴는 파리나 일 드 프랑스보다도 더 평면적이다. 곡선이나 굴곡이라고는 찾을 수 없이 그저 일자 직선만이 지평선을 따라 주욱 이어진다. 하지만 그 단순한 풍경이 너무 평화롭고 풍요로워 보여서 넋을 잃고 바라봤다. 프랑스를 지탱하는 농업의 힘과 그 유명한 샹파뉴 와인 역시 이 풍요로움이 낳은 선물이리라. 랭스에 처음으로 살던 사람은 갈리아인들 이었다. 이곳에 살던 갈리아 부족 사람들은 스스로를 ‘레메스’ 라고 불렀고 아마 여기서 도시의 이름이 파생된 것이라 추측된다. 이후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으로 이 지역은 로마화 되었고, 로마 멸망까지 로마의 주요 국경도시이자 군사 요새로 역할을 하게 된다. 로마가 쇠락하자 요새 도시의 숙명 상 정면으로 훈족 왕 아틸라의 침공을 받고,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과도기 동안 각종 전쟁과 혼란을 겪으면서 빠르게 기독교화 된 후 프랑크 족의 영역에서 가장 큰 주교령으로 군림하게 된다. 프랑크족 최초의 왕인 클로비스 역시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이 전통 때문에 왕조가 바뀌어도 역대 프랑스 왕들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가 뒤섞인 머릿속을 휘저으면서 단어와 잔상들을 나열하는 사이 어느 새 랭스에 도착했다. 파리 동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40분을 한창 지평선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다 랭스에서 종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내보낸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뾰족한 성당의 첨탑을 보자 내가 왕들의 도시에 왔음을 새삼 실감한다. 트램과 버스가 다니는 길들은 한적하지만 햇빛과 맞닿은 땅이 자아내는 싱싱한 활력이 피부를 타고 스며든다. 햇빛은 강하지만 적절하게 선선한 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며 역에서 시내로 향했다. 푸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위용을 뽐내는 천사의 조각상이 있는 곳을 지나 섬세하게 만들어진 종루가 솟아오른 건축물이 보인다. 얼핏 보면 단순하고 투박해 보이지만, 지붕과 지붕이 이어지는 선의 매끈함과 우뚝 솟은 종루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멀리서 대성당의 첨탑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종루가 바로 이 교회의 종루인데, 그 때문에 역에서 처음 내려서 멀리 랭스의 시가지를 볼 때에는 이 두 첨탑과 종루가 마치 한 건물에서 함께 기대고 있는 이웃처럼 보인다. 하지만 뾰족한 고딕 양식의 첨탑은 랭스 대성당의 부분이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종루는 교회의 종루이다. 어디까지나 이는 멀리서 보았을 때 일어나는 착시현상이고. 교회의 이름은 생 자크로 12세기 초대 랭스의 공작이자 대주교로 부임한 기욤의 주도 하에 지어졌다. 샹파뉴 백작 티보 4세의 아들이던 그는 루이 7세의 매형이기도 했고 그에 따라 프랑스 전역에서도 손꼽는 강력한 권한을 지닌 대주교 중 하나였다. 대혁명을 거치면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이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개보수와 증축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세 특유의 어두움이 남아있으면서 동시에 오묘한 세련됨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랭스라는 도시의 꽃으로 우선 꼽아야 할 것은 역시 대성당이다. 1211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약 100여년에 걸쳐 지어진 성당은 전형적인 고딕 양식으로 축조되었다. 유럽에는 성당으로 유명한 도시들이 많다. 예전에는 거대한 성당이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또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과 시장이 형성되며 도시의 심장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당이 도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성당은 도시의 물질적 생활 기반을 이루고 도시의 구조의 기본을 만드는 척추이자 심장이면서 동시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신앙심과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대뇌였던 것이다. 지금은 과학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고, 믿음 대신 대중문화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종교가 가지는 힘이나 상징은 너무나 연약해진 첨단 문명의 시대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어쩌면 종교란 것은 과거 미개하던 시절의 인간을 위로해주던 유령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종교의 시대가 가고 한 세기를 호령한 왕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 할지라도 그들이 남긴 웅장한 역사의 흔적인 여전히 도도하게 남아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다. 어쩌면 이곳에서 대관식을 올린 왕들은 언젠가 자신들의 시대가 끝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잊혀 질까 두려워 이 거대하고 하얀 성당을 축조하고 그 위에 자신들의 모습을 새긴 게 아닐까 싶다.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은 순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더불어 고귀한 혈통과 이름을 지닌 사람일수록 더더욱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쩌면 고귀한 자 일수록 가장 두려움이 많고 약한 자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어떤 왕들의 이름보다도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이름은 동레미 출신의 처녀 잔다르크가 아닐까 싶다. 왕들이 대관식을 올렸던 호화찬란했던 제단도, 화려한 수태고지 예술품으로 장식된 예배당도 모두 썰렁하지만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잔다르크의 조각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으스스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이름 없는 민중들은 죽으면 그대로 잊혀 사라지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영웅은 시대를 호령한 왕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이름 없는 자들이 기억하는 자가 가장 긴 영생을 누린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매일 보는 노트르담 성당과 두 번을 간 쾰른 대성당도 올라가지 않았지만, 어쩐지 랭스의 대성당은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표를 구매했다. 랭스 대성당의 첨탑은 단체 관광객 투어로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두어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고로 잠시 박물관에 들려 소소하게 시간을 때우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랭스 대성당 옆에는 토(Tau) 궁전과 생 레미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토 궁전은 과거 랭스 대교구를 주관하던 대주교의 거처였고, 생 레미 수도원은 초대 랭스 대주교이자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인 클로비스에게 세례를 한 성 레미게우스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수도원이다. 처음에 베네딕트회의 수도원이었던 이 수도원은 성 레미게우스의 유품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생 레미라는 수도원의 이름 역시 그에게서 유래되었다. 지금은 둘 다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랭스 대성당의 귀중품과 태피스트리 등 각종 예술품이 전시되어있는 중세 미술의 보고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역시 왕들의 조각상이다. 거대한 크기에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조각상들은 어느 성인들의 조각보다도 훨씬 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을 내뿜는다. 고뇌와 고민에 가득 차 종교적 완성을 구하는 얼굴보다도, 사람을 모아 시대를 풍미하고 이름을 날리고자 한 왕들의 얼굴이 더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까진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인 것 같다.


















 시간이 되자 왕들과 성자들이 잠든 고요한 박물관을 뒤로 하고 말끔한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첨탑 계단을 올라갔다. 그냥 조금 올라가면 되겠지 싶었던 첨탑 계단은 생각보다 좁고 가파른 지라 투어를 신청해 올라가던 사람들 모두가 헉헉거리며 벽을 타고 기어가다시피 했던 것 같다. 그 옛날 수도사들도 종을 치기 위해 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새롭다. 노트르담의 종지기이던 꼽추 콰지모도 역시 마찬가지 였을 테고. 하지만 그렇게 헉헉거리며 도달한 성당 꼭대기는 너무나 장관이었던지라 힘들다는 사실을 단번에 잊어버렸다. 특히 첨탑 위에서 본 샹파뉴의 풍경은 풍요롭고 생기가 흘러 넘쳐 입을 벌린 채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이지만 높은 건축물도, 산도 언덕도 없어서 하늘이 아주 낮은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지평선과 땅이 맞닿는 높이가 곧 하늘의 높이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풍경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풍경을 이루는 선 자체는 단순하지만 선과 선이 만나는 면에는 풍요로운 자양분들이 가득 차 있다. 천혜의 자연이 준 선물과 그를 바탕으로 인간이 이뤄낸 찬란한 문명이 평야 위를 수놓고 있는 장면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