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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스트라스부르/20150917] 장밋빛 베일의 성모





 스트라스부르는 여러모로 내게 의미 있는 곳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이자 나의 프랑스 생활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친구인 쥐스틴이 사는 곳이고, 20대 초반 감명깊에 읽었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인 아드소의 기억 속에 가장 또렷하게 자리 잡은 것으로 언급되는 대성당이 있는 곳이다. 소설 속에서 아드소는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을 떠올리면서 느낀 감동을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그 대목때문인지 스트라스부르라는 이름을 들으면 장밋빛 자태를 뽐내는 웅장한 대성당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처음 스트라스부르에 갔을 때, 눈보라와 비가 뒤섞여 휘몰아치는 날씨 때문에 정신없이 우산을 피던 와중에도 거대한 장미를 연상시키는 대성당의 붉은 피부와 위엄있는 자태에 넋을 잃었었다. 종교를 믿지 않는 현재인인 나의 눈에도 신비로움의 극치였는데, 하물며 중세의 수도사인 아드소의 눈에는 성모 마리아의 현신 그 자체였을 것이다.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힘들고 곤궁하던 그들이었지만 열심히 살고 기도하면 분명 언젠가는 성모의 가호를 받아 성당의 첨탑을 통해 천국에 이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마 그렇기에 그들은 힘들어도 묵묵하게 그들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굳게 결심을 하고 성당의 꼭대기에 올라갔다. 중세에는 수도사들과 종지기들의 전유물이자 천국으로 향하는 열망을 실현시켜주는 특권이던 첨탑 위에 올라가기로 했다. 도도한 랭스의 첨탑이 올라가는 인간의 체력을 시험하며 비웃었던 기억처럼, 스트라스부르의 노트르담도 마찬가지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종교를 전혀 믿지 않는 현대인이다. 신의 존재에도 의문을 표하고 신앙보다는 과학의 힘을 믿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과학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음을 알기에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그 먼 옛날 이 계단을 오르던 수도사들의 마음이든 혹은 경외에 찬 눈으로 첨탑과 제단을 바라보며 천국에 갈 날만을 기다리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든, 과학은 인간에게 새로운 지평을 주었지만 동시에 또 다른 한계를 주었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맹신에서 빠지지 못하는 자는 더 이상 새로운 의문점을 해결할 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과학이 인간에게 선사한 시험이자 한계이다. 문명의 혜택을 받는 현대인으로써 과학을 믿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과학이 없는 시대에 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주제를 공부하면서 과학이 주는 편의성을 맹신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성당 위에서 본 스트라스부르는 도시의 상징인 대성당만큼이나 붉고 아름다운 장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파리의 지붕들은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이고, 거의 모든 건물들은 세련되게 정돈된 오스만 양식의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어스름한 새벽이 되면 푸른빛과 아이보리 색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진주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스트라스부르는 지붕도 건물도 모두 붉다. 다양하게 변주를 울리는 붉은 색들이 하나의 거대한 장미가 되어 땅 위에 수놓아진 것 같다. 마치 건물들 하나하나가 장미를 이루는 꽃잎 하나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분명 9월은 장미가 피는 계절이 아닌데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사계절 내내 장미가 핀다는 인상이 뇌리가 진하게 각인된다. 스트라스부르를 처음 찾는 사람은 비대칭적이지만 아름다운 노트르담 성당을 보며 성스럽고 정결해야 할 성모가 사실은 붉고 관능적인 존재였다는 것에 놀랄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도시 전체가 사계절 활짝 피어있는 장미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이제는 녹슬어서 녹색이 되어버린 성당의 지붕조차고 세월의 흔적이 아닌 아름다운 꽃의 일부처럼 보인다. 날씨가 흐린 것이 아쉬워서 비가 올 때 한 번, 그리고 다시 해가 뜨자 한 번 더 올라가서 꽤 힘이 들었지만 보람 있는 발걸음이었다.
















 성당에서 내려와 친구 쥐스틴과 함께 쁘티 프랑스를 거닐며 이야기를 했다. 친구란 존재는 언제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편안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말이다. 사는 곳이 달라서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일단 만나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존재, 만나는 횟수가 꼭 친밀도를 결정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친구이다. 프랑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 쥐스틴에게서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았던지라 쥐스틴이 사는 알자스에 가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이곳의 역사는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의 혼란과 전란을 겪은 수난의 역사이지만 지금은 그런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평화로운 마을의 정취만이 남아 방문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고, 또 언제 와도 친구가 있는 이곳에 태양이 맑은 날 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