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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아샤펜부르크/20151001-08] 우연이 가져다 준 선물

 아샤펜부르크를 가게 된 계기는 정말로 별 거 없었다. 지난 봄방학 때 바이에른을 여행하면서 ‘프랑켄’이라는 역사적 지명에 대해 알게 되었고 언젠가 한 번 다시 프랑켄 지역의 도시들을 제대로 둘러보겠다는 생각에 프랑켄 지방의 역사와 명물을 적어놓은 가이드북을 하나 샀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온 후 개강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날씨가 좋을 때 숲으로 잠시 머리를 식히러 가자는 마음에 가이드북을 폈는데, 시골인 프랑켄 지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샤펜부르크로 간 후 각 마을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차를 두 번 갈아탈 바에야 그냥 차라리 아샤펜부르크에서 짧게 머물며 도시 구경을 한 후 프랑켄 숲으로 들어가자는 생각에 묵게 된 것이다.










 하지만 충동적인 결정 치고는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 아샤펜부르크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라곤 17세기에 지어진 대주교의 궁전인 요한니스부르크 성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 외에는 가이드북에 쓰여진 역사를 읽으면서 그냥 단편적으로 ‘아, 원래 로마 요새였다가 프랑크 왕국의 땅이었다가 주교가 지배하게 되었구나’정도만 이해를 했을 뿐이다. 요한니스부르크 성은 생각보다 컸다. 사진으로 봤을 땐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 성이었는데 실제로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까 상당히 규모가 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바로크 양식다운 장식미와 웅장함이 돋보이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던 부분은 직선 일색인 건물 위에 얹어진 둥근 지붕이었다. 특히 직선과 직선을 교차시켜 멀리서 보면 원으로 보이도록 만든 건축 기술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의 구조는 파리 근교 생 제르맹 엉 레에 있는 프랑스의 왕실 궁전이랑 유사하지만 중세의 건축물에 바로크가 살짝 더해진 생 제르맹 엉 레 성과는 달리 전체 건물 양식이 모두 바로크 양식이다. 원래 이 성은 마인츠 대주교의 하계 별장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간 날은 독일의 날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날씨가 좋아서 왜 대주교가 굳이 이곳에 별장을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날씨가 워낙 좋았던 지라 성 안에 들어가 전시를 구경하는 대신 성 주변의 산책로를 따라 산책을 하기로 했다. 칙칙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로 유명한 독일이지만 바이에른은 그나마 날씨가 화창하다. 특히 태양이 환하게 하늘에 걸릴 때 푸른 하늘 아래에서 숲의 이불을 덮고 있는 작은 마을들의 모습은 동화 속 풍경이 튀어나온 것만 같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 조용히 흐르고 있는 마인 강과 강 옆에서 살포시 옹크리고 있는 성과 수풀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성 옆의 가파른 구릉에는 포도밭이 있는데 이 포도밭에서도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화이트 와인인 프랑켄 와인이 생산된다고 한다. 봄에 뷔르츠부르크에서 마신 리슬링 와인은 건조하지만 오묘한 향이 풍기는 남성적인 와인이었다. 프랑켄 와인의 전반적인 특성이라고 한다. 텁텁하지만 끝 맛이 달콤하게 감겼던 게 꽤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는데 아쉽게도 아샤펜부르크에서는 와인을 마시지 못했다. 언젠가는 아샤펜부르크의 프랑켄 와인도 마실 날이 오겠지.




















 하지만 와인을 마시는 것 이상으로 즐거웠던 것은 와인 밭과 강을 따라가는 산책이다. 종교전쟁 이후 많게는 300개가 넘는 영방국으로 분열되었던 독일인지라 아샤펜부르크도 과거에는 프랑켄 지방의 독립국이었다. 물론 프로이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등의 비교적 큰 왕국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골짜기와 강 하나만 건너도 다른 나라였다. 현재 바이에른 북부와 바덴-뷔르템베르크, 헤센, 튀링엔의 일부로 이루어진 프랑켄 지역에서는 유달리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지난번에 방문했던 도시들만 해도 얼마 안 떨어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뉘른베르크는 개신교, 뷔르츠부르크와 밤베르크는 카톨릭으로 남았으니 작은 공동체 하나하나가 곧 국가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샤펜부르크 역시 30년 전쟁동안 치열하게 싸운 곳인데, 본래 주교가 다스리다가 세속화된 도시인만큼 이곳은 굳건한 카톨릭 도시로 남게 되었다. 19세기에 바이에른에 귀속되었지만 워낙 오랫동안 작은 독립 국가였던지라 그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이곳은 바이에른의 중심부인 뮌헨이랑은 350킬로미나 떨어져있지만 프랑크푸르트랑은 40킬로미터 거리에 있고, 아직도 주민들은 독자적인 지역 의식을 지니고 있다. 아샤펜부르크의 상징인 화려한 궁전과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바이에른 왕의 취향이 반영된 별장인 빌라 폼페이는 와인과 자연 풍광을 따라 이어져있는데 바꿔 말하자면 이 아름다운 길이 바로 아샤펜부르크의 고단한 역사와 지역의식을 보여주는 파노라마라 할 수 있겠다. 햇살이 부서지면서 마인 강에 내려앉는 광경은 평화롭기 이를 데 없다. 복잡하지만 정신없게 흘러가는 파리의 풍광과는 사뭇 다르다. 시간은 어디서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하루 들린 곳이지만 아샤펜부르크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오랜만에 핸드폰을 완전히 꺼두고 천천히 산책을 하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고르는 시간은 정신 건강 개선에 꽤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일까, 하룻밤만 머물고 아침에 곧장 프랑켄 숲으로 들어가겠다는 예정과는 달리 반나절을 더 아샤펜부르크에 머물며 산책을 했다. 따스하게 햇살이 내리쬐면서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마인 강의 정취와 오래된 교회가 있는 구시가지의 조용한 분위기는 초조함에 달뜬 사람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언젠가는 이곳에 조금 더 길게 머물면서 귀중한 보물들도 구경할 수 있길 바라며 기차 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