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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다름슈타트/20151217-20160103] 존경하던 사람을 좇아 찾아간 곳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룻밤 머물고 난 다음날 기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다름슈타트로 향했다. 전부터 줄곧 가고 싶었지만 번번이 놓치다 드디어 기회를 잡아 다름슈타트로 갔다. 역사, 특히 서양사를 전공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다름슈타트는 꽤나 익숙한 이름이다. 한때 헤센 공국의 중심지 역할을 한 도시였으며 동시에 러시아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비 알렉산드라가 바로 이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름슈타트 전역을 장식하고 있는 유겐트슈틸 양식의 장식 미술들과 건축들도 유명하지만 그런 미술사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 다름슈타트를 지배하던 헤센 공가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그리 크지는 않지만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로 향하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다름슈타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교외 열차인 S-Bahn을 타면 40분을 가야하지만 중앙역에서 지역 열차를 타면 15분 만에 도착한다. 잠깐 창에 걸터앉아 숲을 구경하는 사이 어느새 열차는 다름슈타트에 도착했다는 공지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독일의 겨울날씨는 악명이 높다. 대략 4시에서 5시 사이에 해가 떨어지고, 음침하고 을씨년스러우면서 동시에 차가운 습기가 온몸을 감싸는 찝찝한 날씨가 봄까지 계속된다. 독일인들이 해만 나오면 훌러덩 벗고 공원에 드러눕는 사람들로 소문이 나 있는데, 맞다. 그리고 이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워낙에 햇빛을 보기가 힘든 기후이기 때문에 햇빛만 나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일광욕을 쬐기에 바쁜 것이다. 독일의 겨울 날씨는 특히 침침하고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는지라 악명이 높은데, 내가 다름슈타트에 방문한 날 만큼은 겨울의 독일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해가 높이 걸린 푸른 하늘이 시가지에 내려앉아 있었고, 지상으로 살포시 내려오는 따스한 햇살을 가르며 트램이 시가지를 관통하고 있었다. 단순하고 아담하지만 정갈한 건축물들과 푸른 하늘이 교차하면서 한가로이 트램이 지나다니는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지만 얼굴 시리게 하는 찬바람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오랫동안 헤센 백작령에 속했던 다름슈타트는 14세기 이래로 조용한 공업도시였지만 철도가 개통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헤센 백작령이 대공국으로 승격하면서 현재 다름슈타트 대학의 전신인 학교와 연구소가 세워지고, 나아가 헤센의 루드비히 대공이 전격적으로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후원하여 예술가 마을이 생김으로써 헤센 영방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현재 다름슈타트는 프랑크푸르트, 비스바덴, 그리고 카셀에 이어 헤센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자 프랑크푸르트 대도시권의 일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내가 다름슈타트에 간 목적은 조금 다르다. 물론 다름슈타트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고즈넉하면서 높지 않은 건물들이 완만하고 낮은 선을 그리는 모습이 꽤 낯설면서도 독특하고, 비록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어도 고전적인 아르누보 양식과 현대적인 미학이 녹지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다름슈타트만이 가진 아름다움임에 틀림없다. 허나 내가 다름슈타트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책은 다름이 아닌 이윤기 선생님의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윤기 선생님은 독특하면서 흥미진진한 구성의 신화 해설을 남기셨는데, 선생님께서 남긴 저작에는 다름슈타트에 있는 헤센 주립 박물관 소장품인 그림이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기왕 프랑크푸르트에 온 김에 다름슈타트에 들려서 존경하던 선생님께서 사랑하던 그림들을 볼까 하여 온 것이다.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 박물관은 헤센 주 내 단 세 도시에만 설립된 주립박물관 중 하나이다. 나머지 두 곳은 비스바덴과 카셀이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자연사부터 미술사까지 시대와 분야를 망라하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써 꽤 큰 규모의 박물관이다. 19세기 헤센 대공이었던 루드비히 대공의 컬렉션을 위주로 전시하다가 점점 컬렉션의 규모가 커지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더불어 학생 복지가 잘 되어있는 독일답게 미술사나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만 25세 이하는 무료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박물관답게 컬렉션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만나게 되는 1층 전체가 로마시대와 켈트시대부터 시작해서 르네상스까지 이어지는 회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미있는 점은 현재의 다름슈타트는 종교개혁 이후 독일의 대표적인 개신교 도시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박물관 안에는 상당수의 카톨릭 성인 조각상이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교 개혁 이전의 도시와 이후의 도시가 전혀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이 독일사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무게를 가진 사건임을 실감하게 된다. 전 유럽의 전열을 재구성하고 이웃한 프랑스와 달리 중앙집권과는 거리가 먼 분열의 시대를 걷게 한 사건이니 그 무게가 가벼울 리가 없다.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 박물관에 전시된 성인들의 조각상은 분열 이전의 독일이 중세의 보편적 체계 속에 속해있었고, 다름슈타트라는 작은 도시 역시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표라 할 수 있겠다. 로마 붕괴 이후 유럽을 보편 세계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 종교라는 체계가 부서진 후 각 국가별, 지역별로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한 시대가 종말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렸고, 우리의 시야가 닿은 곳에 남아있는 것들은 오로지 과거의 흔적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형체들일 뿐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품을 둘러본 후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지하로 향했다. 근대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 그 곳에는, 이윤기 선생님이 그렇게나 사랑하던 라파엘 전파의 그림들이 고즈넉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개중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프란츠 폰 슈툭이 그린 스핑크스 그림이다. 1904년에 그려진 그림 속의 스핑크스는 육감적인 나신을 드러낸 채 오묘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슈툭은 퀴즈를 내고 정답을 말하지 못한 사람들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테베의 스핑크스를 성적 욕망의 또 다른 형태로 해석하여 팜므파탈로 형상화했다. 스핑크스가 낸 퀴즈가 인간의 인생을 상징한다는 점, 그리고 스핑크스를 퇴치한 이후의 오이디푸스의 인생 여정을 고려하면 슈툭의 해석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다른 작품들은 볼 수 없었지만 이윤기 선생님이 사랑하던 월터 크레인의 작품은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전원적인 풍경을 즐겨 그린 라파엘 전파의 화가답게 서정적이고 차분한 색감이 돋보이는데, 특히 잔잔한 색채와 섬세한 선을 가지고 사계절의 여신들을 각자의 특징을 부각하며 묘사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얼핏 보면 현대에 그려진 삽화라 해도 믿을 것 같은 세련됨이 돋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각 계절이 지니는 느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표현했다. 적막 속에 자리한 그림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그림들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가 자극하는 상상력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작고하신 이윤기 선생님께서 왜 이곳의 그림들을 유독 책에 많이 올리셨는 지 알 것도 같았다.











 전시를 보고 폐장시간에 맞춰 박물관을 나서자 어느 새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날이 밝아서 건축물을 제대로 볼 수 있을 시간에 마틸데의 언덕을 오르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기왕 다름슈타트에 온 거 한 번이라도 언덕에 오르지 못하면 더 섭섭할 것 같아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르막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어스름한 빛 사이로 거대한 구조물이 보였다. 바로 다름슈타트의 상징인 ‘결혼의 탑’이다. 헤센 대공국의 대공이던 루드비히 대공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이 탑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울브리히의 지휘 아해 건립되었다. 선서를 하는 손가락 모양의 독특한 형상으로 유명한 건물인데, 다름슈타트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가 있는 건물임과 동시에 오늘날 다름슈타트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어두워진지라 마틸데 언덕 예술가촌의 건축물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 버렸고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결혼의 탑과 화려하게 빛나는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뿐이었다. 헤센 공국은 신교국이었지만 헤센의 공주였던 알렉산드라가 러시아 니콜라이 2세에게 시집가면서 정교회로 개종한 지라 그녀의 후원 하에 언덕 위에 정교회 예배당을 건립하게 된다. 이제 시간이 흐른지라 예술가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헤센 대공도,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가족들도 모두 역사책 속의 페이지 한 구석에만 일부를 남기고 있을 뿐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권력을 가진 자들이 남긴 이야기와 소소한 흔적들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일일이 연연할 필요는 없다. 전쟁의 포화를 맞아 옛 모습을 거의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름슈타트는 아주 한적하고 운치 있는 도시이다. 그리고 마틸데 언덕 꼭대기 위에 걸터앉아 본 야경은 은은하면서 고요했던 지라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단지 그곳에 걸터앉아 적막한 침묵에 잠긴 채 저 멀리 보이는 풍경의 실루엣과 작은 불빛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순간을 살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