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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루드비히스부르크/141127-141130] Ludwigsburg, 기대치 않은 하루

 

 

 

 

 


 이번 여행에서 저지른 실수 중 가장 바보 같은 실수를 꼽자면, ‘와인도 술’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아주 깔끔하게 까먹었다는 것이다. 뜨겁게 끓여서 독특한 향을 넣은 따뜻한 와인, 프랑스에서는 뱅 쇼(Vin chaud)라고 하고 독일에서는 글뤼바인(Glühwein)이라고 한다.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사람들이 한 손에는 컵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 컵에 들어있는 음료 대부분이 바로 이 글뤼바인이다. 와인하면은 보통 프랑스를 많이 떠올리지만 사실 독일 역시 와인으로는 뒤지지 않는다. 특히 남쪽의 유명한 화이트 와인인 모젤 와인은 유럽 내에서도 유명한 와인 중 하나이고, 바덴-뷔르템베르크 역시 손꼽히는 와인 생산지 중 하나이다.

 

슈투트가르트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처음 마셔본 글뤼바인은 정말 맛있었다. 와인은 끓인 다음에 럼주를 첨가해서 독특한 풍미가 느껴졌는데, 쌀쌀한 날씨와는 대비되는 포근함과 알싸한 향에 취해서 그대로 여러 잔 마셔버렸다. 다행히 다음날 숙취가 있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살짝 어지러운 상태에서 늦잠을 자버렸고, 조금 느즈막히 일어나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루드비히스부르크에 가게 된 계기는 별게 없었다. 그냥 어쩌다가 인터넷에서 보게 된 루드비히스부르크의 뷔르템베르크 여름별궁인 레지덴츠슐로스(Residenzschloss)가 너무 멋졌던 지라 그곳에 가고 싶어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루드비히스부르크는 슈투트가르트 바로 옆에 위치한 외곽 도시이지만, 말이 도시이지 규모로 따지면 작은 시골 마을이다. 같은 위성도시라 해도 일산이나 수원, 성남과는 느낌이 확실하게 다르다. 도심이나 도심 외곽이나, 도시나 농촌이나 큰 차이나 경계 없이 연속선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서울의 지하철 창밖 풍경이나 파리의 RER을 타면 보이는 풍경들과는 너무나 상반된다.

 


 

 

 

 

 

 

 루드비히스부르크에 간 날은 정말로 하늘이 회색이었다. 푸른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완벽한 회색하늘이 머리 위로 무겁게 드리워진 채 도시 전체에 내려앉아 있었고, 바람은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날씨 때문인지 도시에는 인적이 없었고, 간혹 지나다니는 노년의 독일인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흘끔 쳐다보다 제 갈 길을 갔다. 동양인은커녕 외지인도 하나도 보기 힘든 작은 시골 마을이라 그랬는지, 혹은 칼 같은 독일의 바람에 비하면 너무나 얇은 내 옷이 이상해보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급하게 수업 끝나고 부랴부랴 출발한 지라 파리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갔는데, 파리에서는 무난하고 깔끔하던 옷이 독일에 가니까 너무 화려하고 튀어서 살짝 눈치가 보였었다.)

 

 루드비히스부르크 레지덴츠슐로스는 앞서 말했다시피 뷔르템베르크 공의 여름 별궁이었다. 인터넷이나 가이드북에서 본 레지덴츠슐로스의 사진들은 여름에 촬영한 사진들이라 그런지 화사하고 싱그러웠지만, 요즈음의 독일 날씨는 쌀쌀하기 그지없는데다 하늘은 종일 회색이라서 궁전의 모습은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내가 파리에 살아서 그런지 건물 자체가 그다지 화려해보이지 않고 오히려 단조로워 보이는 면도 한 몫 했을 터 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이 활짝 피고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름의 사진보다 음울하고 싸늘하지만 맨얼굴을 다 보이고 있는 겨울의 궁전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전자는 이미 박제가 되어버린 궁전에 관광객과 햇빛이 포장되어 있는 느낌이었다면, 오히려 후자의 경우는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던 그 옛날의 궁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중에 여름에 다시 이곳에 왔을 때도 내가 똑같은 감정을 느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겨울의 레지덴츠슐로스는 적막하고 쓸쓸한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아마 예전에 이곳에서 일하던 고용인들도 쌀쌀한 바람을 피해 두터운 외투 속에 몸을 숨기며 궁 안을 가로질러 다녔겠지. 그리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은 채 사람들의 활기가 역사를 대체하고 있다.

 

 적막한 멋이 느껴지는 궁을 뒤로하고 나왔다. 관람을 마치고 나니 애매한 시간이 되어있어서 어디를 갈 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길을 잃어버렸다. 작은 마을이라서 만만하게 생각하고 돌아다니다가 역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파리에 온 이후로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한숨을 쉬며 터벅터벅 걷기만 했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마주친 곳이 바로 루드비히스부르크 시내의 중앙광장이었다. 이곳 역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고, 해가 슬슬 떨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모여서 전날 들린 슈투트가르트의 크리스마스 마켓 못지않은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원래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분위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거기서 발걸음을 멈췄다.

 

 

 

 

 

 

 

 

 

 

 

 

 

 

 

 

 슈투트가르트와 루드비히스부르크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루드비히스부르크가 훨씬 작다는 것이다. 물론 슈투트가르트도 파리에 비하면 작은 도시이지만 그래도 슈투트가르트는 한 주의 주도이자 자동차 산업의 중심인 대도시이다. 어쨌거나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선 슈투트가르트가 가장 큰 중심지이니까. 반면 루드비히스부르크는 역 주변의 작은 광장과 교회가 전부인 독일의 시골 마을이다. 크리스마스 마켓 한 가운데에 서서 와인을 마시면서 조용히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로 모든 사람이 서로를 다 알고 있는 조그만 공동체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두가 모두를 알고 지내는 좁은 마을, 중세의 장원이나 다를 바 없는 독일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독일인들에게는 은근히 알려진 곳인지 간간히 외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지만 그 마저도 대부분이 독일인이었고, 그래도 아시아인이 몇몇은 보이던 슈투트가르트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로 나 혼자만 아시아인이었다. 어색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이미 내 차림새를 보고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사람들이 슈투트가르트에도 꽤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파리보다 훨씬 쌀쌀한 이곳에선, 파리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내가 정말로 이방인 티를 팍팍 풍기고 있었겠지. 

 

 

 

 

 

 

 

 어둠이 떨어지자 크리스마스 마켓의 조명이 빛나기 시작하면서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점점 새카맣게 변해가는 하늘과 반짝이는 일루미네이션이 대조를 이루면서 시야를 사로잡았고,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활기를 더해갔다. 그 인파의 한가운데에서 와인 잔을 붙잡은 채 창공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조명을 보며 마치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양 넋을 놓고 있을 때, 젊었을 때는 제법 근사했을 법한 외모를 지닌 장신의 은발 중년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아가씨, 나랑 이 친구 둘이서 사진 좀 찍으려는데 아가씨가 좀 찍어줘요. 스마트폰은 젊은 사람들이 더 잘 다루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넘겨받고 사진을 찍었다. 나도 예전에 써본 적이 있는 삼성 제품인지라 다루는 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하필이면 두 사람이 서 있는 각도가 사진이 안 나오는 각도여서 자리를 바꾼 후 몇 장을 찍고 넘겨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신사가 사진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말을 걸었다.

 

“아가씨도 관광객이죠?”

 

 그렇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나도 관광객 이예요. 나랑 이 친구, 둘 다 바이에른 출신이고 뮌헨에 사는데 여기 잠깐 놀러온 거예요. 그런데 아가씨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독일어 꽤 잘 하는데 중간 중간에 프랑스어 악센트가 섞여 나오네요.”

 

 한국인이지만 지금은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고, 독일엔 잠깐 기분전환 삼아 놀러왔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곧 손짓을 하며 자신의 일행인 젊은 여자를 우리 쪽으로 데려왔다.

 

“이봐, 이 동양인 아가씨 말이야. 지금 파리에서 살고 있다더군.”

 

 그 말에 다가온 여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프랑스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알고 봤더니 여자는 라로셸(La Rochelle)출신의 프랑스인이고 예전에 파리에서 산 적이 있는데, 지금은 뮌헨에 살면서 내가 사진을 찍어준 남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했다.

 

“동양인인데 독일어에 프랑스어 악센트가 있군요! 와! 세상에나!”

 

 여자가 놀라워하면서 말하자 모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프랑스어 악센트를 가지고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잠깐 배웠던 서바이벌 독일어가 어느 새 독일 도착하는 순간 실전 밀착형 야매 독일어로 완벽하게 적응해서 조금 안심을 했는데, 불리하면 나도 모르게 프랑스어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긴 했다. 하기사. 그러니까 독일어를 할 때도 프랑스어를 할 때의 습관이 많이 남아있겠지. 나는 모르지만 들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재밌으면서 그로테스크하게 들릴 수 있는 억양이나 발음 습관들이.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그들과 헤어지고 나는 다시 크리스마스 마켓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돌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이들과 놀러 나온 아빠들이 참 많다는 것이었다. 특히 아빠들이 아이들을 어깨에 걸쳐 목 위로 올리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도 아이들과 놀러 나온 아빠들을 많이 보긴 했지만 아이들을 목 위에 얹고 다니는 아빠들은 보지 못했는데, 독일에선 어디를 가나 볼 수 있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든 루드비히스부르크에서든... 엄마들만이 육아의 책임을 떠맡는 한국과는 달리 아버지 역시 공동으로 육아의 책임을 지는 것이 생활화 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소 씁쓸해졌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노 키즈 존(No Kids Zone)’논쟁에는 자신의 아이만이 세상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가족 이기주의와 아이들을 통제하는 데 지쳐서 모든 것을 내던진 불평등한 육아 분담의 현실이 결합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것을 볼 수 없었다. 독일에서든 프랑스에서든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동의 양육 책임을 지고,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에게는 그에 합당한 벌칙을 주며 교육을 시킨다. 어쩌면 난 아이들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아이를 낳아놓기만 하고 책임과 통제는 하나도 이행하지 않는 한국의 부모들이 싫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작지만 반짝거리는 예쁜 마을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며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걸었던 나는 호텔로 오자마자 그대로 뻗어버렸다. 말 그대로 죽은 사람처럼 잤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