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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아헨/141219-141229] Aachen, 샤를마뉴의 도시, 그리고 당일치기 시간여행







 독일과 벨기에, 네덜란드의 국경도시인 아헨(Aachen), 프랑스어로는 액스-라-샤펠(Aix-la-chapelle)이라고도 한다. 라 샤펠(La chapelle)은 예배당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단어이고, 그러한 고로 액스-라-샤펠은 '예배당이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그 유명한 아헨 대 성당(Aachener Dom)의 역할이 컸다. 아헨 대성당은 아헨 대교구의 주교가 관할하는 성당으로, 8세기에 샤를마뉴 대제가 처음으로 건설한 이후 여러 번 개보수를 반복해서 지금은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물이다. 아헨 대성당의 또 다른 명칭인 ‘황제의 돔(Kaiserdom)’도 샤를마뉴에게서 유래되었다. 800년, 샤를마뉴가 대관식을 거행한 직후 왕실 예배당으로 건립한 이 성당은 알프스 이북 최초의 성당으로써 상징성을 가지고 그 이후 수 백년 동안 신성로마 황제들의 대관식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샤를마뉴 대제가 ‘완공’했다는 말은 틀린 표현이다. 그 이후로도 성당의 증축은 계속되었고, 대표적인 예로 대성당의 상징인 뾰족한 첨탑은 14세기에 건설된 것이다. 성당의 본 예배당처럼 전형적인 로마 공회당 양식인 바실리카에 충실한 건물들과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쾰른 대성당을 연상시키는 고딕 양식의 첨탑들이 함께 어우러진 이유이다.










 아헨 역에서 나와 거주지가 몰려있는 골목을 가로질러 극장을 지나면 멀리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바로 대성당의 고딕 양식 첨탑이다. 독일에선 3G 연결이 되지 않아 구글 지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가 없어서 대충 긴가민가하면서 길을 찾고 있었는데, 아헨 시립 극장 앞에서 첨탑의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바로 관광 정보 센터에 들려서 지도를 들고 아헨의 심장부로 발걸음을 파고들었다.









 대성당은 생각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아니, 어쩌면 노트르담이나 쾰른 대성당 같은 거대한 고딕 성당을 먼저 본 나에게만 작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천국이 있는 하늘과 지상을 잇는 집을 짓겠다는 중세의 집념이 느껴지는 높고 웅장한 고딕 양식의 성당에 비해, 고딕 양식의 첨탑 외에는 기본적으로 둥근 로마식의 바실리카 양식은 아헨 대성당은 높이 자체가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멀리서 보았을 때의 이야기지 가까이서 보면 첫인상보다 훨씬 더 성당의 규모가 크다는 것에 놀라게 되고, 또 대성당 내부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둥근 바실리카 양식의 천장으로 건축된 예배당 내부는 다소 어둡지만 시간과 날씨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면서 안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낸다. 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색색의 모자이크 창과 예배당 한 가운데 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상징은 빛이 들어오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연출하면서 마치 승천한 성모와 예수가 예배당으로 강림하여 움직이는 것만 같은 환상을 만들어낸다. 신을 믿지 않는 현대인인 나의 눈에도 이렇게 성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니 중세 사람들의 눈에는 경배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아헨은 작은 소도시로 걸어서 반나절이면 도시 전체를 보기엔 충분하다. 워낙 작은 도시라는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큰 기대는 안하고, 그저 중세사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 그 유명한 대성당이나 보자는 마음으로 갔지만 생각보다 활기차고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거리 곳곳에는 유서 깊은 중세의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하나하나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다. 더불어 내가 갔을 때에는 아헨 역시 크리스마스 마켓이 활기차게 열리고 있었던지라 크리스마스 마켓과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거리 풍경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14세기에 지어졌다는 시청은 작고 아담하지만 그 소박한 모습에서 시민사회의 성장이 느껴진다. 궁전처럼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농촌의 장원을 넘어 상공 시민계층이 주도적으로 성장해서 도시를 이끌었다는 느낌이 드는 실용적인 디자인이 돋보인다. 그리고 시청의 건물 외벽에 섬세하게 조각된 여러 성인(聖人)들의 형상과 시청 앞의 크리스마스 마켓의 모습에서 중세의 향이 물씬 풍긴다. 필시 중세의 성 축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행사가 이런 모습 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헨은 결코 박제된 도시가 아니다. 여유롭지만 활기가 넘친다. 처음에 역에서 내려 도시를 돌아다닐 때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젊은 남자들이 많아서 놀랐었는데 알고 보니 이 도시에 꽤 유명하고 규모도 큰 공과대학이 있고, 기술 전문학교들도 상당히 많이 자리 잡고 있어서 20대 남학생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인구의 20% 가량이 학생, 그것도 남학생들이 대다수이고 독일뿐만 아니라 벨기에, 네덜란드 등에서도 이곳으로 수학하러 온다고 한다. 오래 된 역사 도시이지만 동시에 교육의 도시이자 젊음의 활기로 가득 찬 도시이다. 크리스마스 마켓과 대성당 주변에서도 삼삼오오 모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하는 젊은 청춘들이 자아내는 생기가 느껴졌고, 소도시지만 서점과 극장의 규모가 상당히 크지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장애인들을 배려한 계단과 시설들이 곳곳에 보였고. 고즈넉하고 분위기 좋은 역사도시에 문화와 젊음의 힘이 더해져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대학이자 독일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공대인 라인-베스트팔렌 아헨 공과대학의 모토는 ‘미래는 우리에게서 시작된다(Zukunft beginnt bei uns)’ 인데 이는 아헨 시의 모토이기도 하다고 한다.








 아헨은 국제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도시라서 그런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오가는 버스들이 시내버스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역의 서점과 신문 가판대에도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로 된 신문들이 놓여 있었고, 안내판들 역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동시에 병기하고 있었다. 국경 지대인 데다가 유명한 이공계 및 기술학교들이 많아 각지에서 학생들이 찾아오고, 또 이곳이 벨기에와 네덜란드보다 물가가 저렴해서 쇼핑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배려를 넘어 또 다른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유럽 통합’이다. 도시의 상징인 대성당을 건립한 샤를마뉴라는 인물은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알프스 이북에서 최초로 통일 제국인 프랑크 왕국을 이룩하여 유럽통합의 꿈을 불어넣은 존재이다. 비록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의 시기에 상황을 평정시키고 통일 제국을 이룩한 샤를마뉴의 이념은 이 도시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동방에는 콘스탄티노플이 로마를 계승하여 평화와 통일 제국을 이루었다면, 서방에서는 샤를마뉴의 제국과 아헨 대성당이 있었다. 비록 로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야만과 어둠의 시대가 엄습했다 하여도 로마는 다시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플로, 서쪽에서는 아헨으로 재탄생되어 명맥을 이루고 평화와 안정에 대한 사람들의 꿈을 충족시켜준 것이다. 그리고 샤를마뉴와 역대 신성로마제국 독일 황제들의 대관식이 진행되던 아헨 대성당에서는 이제는 샤를마뉴 상(常)의 수여식이 열린다. 해마다 유럽통합에 기여한 인물을 선정해서 이 상을 준다고 하는데, 화합과 통합을 상징하는 샤를마뉴의 이름이 붙인 상이 이 도시에서 수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기에 국경지대와 젊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도시의 노력은 곧 샤를마뉴의 이념에 대한 계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거리 속에서 만화경처럼 전개되는 다채로운 젊음의 모습이 상당히 이채로웠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한꺼번에 보는 ‘시간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