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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쾰른/141219-141229] Ludwigsmuseum, 현대미술: 세대를 넘어서










 대성당과 라인강을 바로 곁에 끼고 로마-게르만 박물관 옆에 나란히 위치한 루드비히 박물관(Ludwigsmuseum)은 근현대 미술 작품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많지만, 그 외에 추상주의, 입체주의, 팝아트 등 등 다양한 분파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고, 피카소나 브랑쿠시 같은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들 역시 다수 소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20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현대미술을 총망라하고 있는 곳이 할 수 있겠다. 물관은 원래 하우브리히(Josef Haubrich)가 자신이 소장했던 모던아트 작품을 쾰른 시에 기부함으로써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설립되었다. 이후 피카소의 작품과 러시아의 전위 예술가들, 미국의 팝아트, 초현실주의 회화 등 모던아트를 소장했던 루드비히 부부(Peter & Irene Ludwig)의 소장품들이 더해져 현재의 박물관이 확립되었다. 현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의 대다수는 이 루드비히 부부가 기증한 것들이고, 박물관의 이름 역시 이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마침 20세기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실 현대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잘 알지는 못하는데, 팝아트는 그래도 이름은 들어본 작가들이 많다.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경우는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들이기에 알고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홀을 걸어 다니면서 작품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전혀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색과 선의 덩어리로만 보이는 작품들부터 시작해서, 원래 알고 있는 사물들이지만 어쩐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작품들까지.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 현대미술의 특징이라지만 아직까지는 잘 와 닿지 않는다. 그저 난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만이 궁금해질 뿐이다. 하지만 굳이 답을 찾을 필요도 없이 눈에 보이고 내가 느끼는 대로 작품을 보면 된다는 말에 따라 천천히 마음이 가는 대로 돌아다닐 뿐이다.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팝아트 작가이다. 그 중에서도 앤디 워홀의 캔 시리즈와 초상화 시리즈는 팝아트의 아이콘이라 손꼽히는 작품인데, 이 같은 현대미술의 상징을 쾰른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꽤 놀랐었다. 루드비히 박물관의 성립에 큰 공헌을 한 기부자 피터 루드비히의 초상화부터 마릴린 먼로, 그리고 재클린 케네디의 초상화까지. 20세기를 뒤흔든 문화 아이콘들의 초상화가 다양한 색채로 복제되어서 나열되어있는 모습을 보다 보면 끊임없이 복제되고 소비되다가 다시 재생산되는 현대 사회의 대중문화의 특성을 공간으로 느끼게 된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마릴린 먼로를 비롯해서 엘리자베스 테일러, 라나 터너, 제인 폰다 심지어 영부인이던 재클린 케네디까지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작품 소재로 택한 워홀이 오드리 햅번 만큼은 한 번도 작품에 등장시킨 적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이미지와 미술, 그리고 대중문화라는 요소들의 연결 고리 속에서 한 번 쯤은 생각해볼만한 흥밋거리가 아닐까 싶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작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씨앗이 발화하던 때 이다. 번쩍거리는 금속의 재질을 무기를 상징하고, 정신없이 이것저것이 엉켜있는 것 같은 모습은 전쟁과 그로 인한 참혹함, 그리고 전후의 혼란을 드러내주고 있다. 여럿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군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얼굴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측하건데 아마 이들의 얼굴을 배제한 것은 전장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의 용사들에 대한 헌사가 아닐까 싶다. 1차, 2차 세계대전부터 중일전쟁,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중동 전쟁, 르완다 내전, 발칸반도 전쟁 등등...20세기는 피와 철의 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폭력적인 세기였으며,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하는 군인들 외에 민간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전쟁에 희생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전쟁 중에 시신도 못 찾고 희생된 사람들과, 유체는 발견되었으나 신원확인이 되지 않고 떠도는 시신들의 숫자 역시 엄청나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얼굴이 없는 것은 이런 식으로 희생된 수많은 무명의 용사들과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함일 것이다. 작품은 단순히 설치 미술로만 끝나지 않는다. 전시에 방송되는 라디오 역시 함께 틀어줌으로써 효과를 더욱 극대화한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집중시키며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으로 관객을 안내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극적 효과를 더욱 부각시켜준 것은 작품 그 자체가 지닌 요소보다도, 내 옆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있던 독일인 관객이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나 쾰른에서나 서점과 박물관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루드비히 박물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관람한 날은 유난히 독일인 노년 관람객이 많았고, 그 중 백발이 성성한 한 할아버지가 손자의 손을 잡고 내 옆에서 같이 작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썹 사이를 살짝 찡그리던 그는 멍하니 작품을 바라보는 손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입을 열었다.


“봐라, 얘야. 전쟁이란 참혹한 것이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괴물 같은 것이란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은 어리석게도 전쟁을 택했고, 그 결과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살아가고 있단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사명이란다. 너도, 나도 말이다.”


 평온하지만 착잡한 얼굴로 손자에게 차분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슬펐지만, 한편으로 는 힘이 있었다.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쾰른을 비롯한 라인란트 지역이 입은 피해는 독일 내에서도 가장 심각했다. 라인란트는 가장 나치에 강력하게 저항한 곳이었고, 특히 라인란트 주교회를 비롯한 기독교 세력이 시민들을 규합하여 반나치 운동을 전개하여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비밀경찰에게 희생당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에게 가장 심하게 폭격을 당한 곳이 라인란트였는데 이는 라인란트가 프랑스의 접경지대에 있는데다가 공장과 산업시설이 밀집되어있기 때문에 독일의 재건을 막으려는 연합군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도시들 중 가장 심하게 폭격을 당한 곳은 드레스덴 이었지만, 쾰른 역시 드레스덴 못지 않게 엉망이 되었다. 드레스덴을 폭격하기 직전에 영국군 장교 해리스는 쾰른을 폭격하는데, 이 때 해리스는 군수시설과 산업시설 뿐만 아니라 민간인 거주지까지도 무차별로 폭탄을 뿌려 폭격을 하는 군사작전을 시행한다. 이른바 ‘융단 폭격’이란 말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 바로 쾰른인 것이다. 대성당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폭격 대상에서 벗어나지만 폭염으로 인해 그을리는 피해를 입게 되고, 지금까지 쾰른 대성당의 표면에 남아있는 검은 자국은 이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더불어 실종자만 9만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가장 나치에게 협조적이었던 바이에른이 폭격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쉽게 재건에 성공한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과거의 잘못을 부정하며 이웃 국가들을 위협하는 행위들과는 비교도 거론도 할 필요가 없고.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미래 세대에게 역사를 강조하고, 다시는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말 것을 반복적으로 당부한다. 이제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가고, 지금은 68 혁명을 주도한 그 자식 세대가 백발이 되어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온다. 하지만 아직도 과거 청산은 끝나지 않았고,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된다. ‘절대로 과거의 실수는 반복되면 안된다’는 구호는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