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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쾰른/141219-141229] Hallo, Herr Adenauer! 아데나워와의 만남

 예전에 독일 문학 시간에 교수님이 하신 이야기 중에 기억이 남는 말이 하나 있다. “최근의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들 대다수가 ‘가장 믿을만하고 좋은 이웃 국가’로 독일을 꼽았다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다”라는 이야기 인데, 사실은 나도 궁금하다.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와 현대사의 전개 과정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파리에서도 나이 드신 분들이 종종 ‘이탈리아나 스페인 녀석들보단 독일 애들이 더 성실하고 일을 잘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긴 했지만 그것과 ‘믿을만하고 좋은 이웃’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이다. 거기다 독일이 두 번이나 세계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이고, 이로 인해 프랑스 역시 4년을 나치 치하에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 여론 조사의 출처와 그와 관련한 사항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쾰른 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한 조각상 덕분에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전의 포스팅 에서 언급했다시피 내 숙소는 쾰른의 중심가이자 대표적인 쇼핑거리인 쉴더가세(Schildergasse)와 연결된 노이어마크트(Neumarkt) 광장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이 노이어마크트에는 쾰른의 대표적인 교회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성 아포스텔렌(St.Apostelen) 교회가 있다. 쾰른에는 쾰른의 상징인 대성당 외에도 고전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이 많은 지라 거리 곳곳에서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포스텔렌 교회는 이러한 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교회에 속한다. 950년에 베네딕트회 수도사이자 오토 1세의 형제였던 브루노가 처음 증축한 것이 시초가 되어, 이후 오토 2세의 아내인 테오파니가 추가로 증축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쾰른은 교회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교회가 많다. 내가 머물던 호텔 뒤편에는 마우리티우스(Mauritius Kirche)라는 교회까지 있었으니 한 구획에 교회가 두 개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라인 강변과 도시 곳곳을 거닐다 보면 정말 많이 만나게 된다. 쾰른 대교구가 카톨릭 세계에선 상당히 큰 교구였던 만큼 쾰른은 주변의 도르드문트, 뒤셀도르프, 부퍼탈 등의 지역이 종교 전쟁을 통해 루터교로 전환할 때에도 카톨릭으로 남았다. 물론 민중들의 시위로 인해 쾰른 대주교가 본으로 망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긴 했었지만 어쨌든 지금도 쾰른은 라인란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카톨릭 도시이다. 그리고 그런 도시이기에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교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이고.


 쾰른은 2차 세계 대전 때 가장 많이 피해를 본 지역 중 하나이다. 연합군에게 집중적인 타격은 받은 드레스덴 다음으로 파괴가 심했던 곳이 바로 쾰른이다. 라인 강변 유역은 프랑스 접경지대로 1차 대전이나 2차 대전 모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곳인데다 산업 및 군수시설이 몰려있어서 집중적인 포격 대상이 되었다. 그 유명한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서부전선이 바로 라인란트이다. 그리고 ‘융단 폭격’이라는 말도 연합군의 쾰른 폭격에서 비롯된 말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나치의 패색이 접어들 무렵, 영국군 장교 해리스는 나치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겠다는 작전 하에 쾰른 상공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폭탄 투하를 실시하고 이 때 도시의 상당부분이 파괴되었다.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도 놀랍지만, 두 번이나 완벽하게 패했다는 것도 놀랍고, 또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와 청년기를 1차 대전으로 보낸 세대가 중년이 돼서 나치를 지지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아마 이 세대가 대강 레마르크와 브레히트 또래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엉망진창이 되어서도 다시 일어섰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면, 성 아포스텔렌 교회와 루돌프 광장 사이를 걷다 우연히 만난 조각상의 주인공 때문이었다. 바로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 전 서독 수상. 서독의 초대 수상으로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재임한 그는 전후 혼란기에 빠진 독일을 수습하고 잿더미의 독일을 재건해서 다시 국제 사회에 내보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나치에 반대하다가 수용소 생활까지 했던 그는 나치가 물러나자 다시 정치 무대에 복귀하였고, 경제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라인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독일의 부흥을 이루어냈다. 특히 프랑스와의 관계 회복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국제 사회의 불신을 해소하고 나아가 이웃 국가인 프랑스와의 앙금을 품으로써 경제 및 정치적 상호협력을 증대하기 위함이었다. 아데나워와 드골이 구상한 경제협력체계는 후에 베네룩스 3국이 가담함으로써 현재 EU체계의 전신이 되었다. 전후 독일을 물질과 정신 양 측면 모두에서 복구한 것이다. 쾰른은 그의 출생지이자 고향이다. 실제 아데나워는 쾰른 시장을 지내기도 하였고. 독일을 회복시키고 현재까지 오게 한 인물이기에 그에 대한 쾰른 시민들의 사랑과 자부심 역시 대단하다. 고집스럽고 완고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 독일을 재건할 수 있었으리라.

 

 아마도 ‘프랑스인들이 생각하는 좋은 이웃’으로써의 독일인이란, 어쩌면 아데나워와 서독의 라인란트 사람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독일은 부흥을 이룰 수 있었고, 동시에 프랑스와의 관계를 회복하며 국제 사회의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심하게 전쟁의 상흔을 입었지만 가장 힘차게 일어서 재건을 주도한 역동성이 느껴진다. 어제의 적군이 오늘의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가 된 것을 보니 역사란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적군에서 파트너로 탈바꿈하고 미래 세대에게 평화를 물려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하는 감탄도 든다. 역사란 끊임없는 자기반성의 연속이고, 실천이 없이는 역사의 의미도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쾰른에 와서 아데나워를 본다면 그 때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