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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프랑크푸르트/20150212-20150215] 즐거움은 기대치 않은 곳에서 오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아주 운이 좋았다. 물론 어느 여행이 즐겁지 아니 하겠느냐만 이번 여행의 경우는 정말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운이 좋았다. 계속 이렇게 운이 좋다면 평생을 여행만 다니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운이 좋았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이다. 슈투트가르트와 쾰른을 여행할 때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이상으로 기억에 남는다. 한창 정신없고 할 일도 많을 때 훌쩍 떠난 여행이었지만, 그런 과감한 결정이 절대로 후회되지 않을 정도의 만남들이 참 많았다.






 사실 기본적으로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가 관광을 하러 가는 도시가 아니고, 그렇기에 별거 없다는 이야기만을 들은지라 기대를 하지 않고 갔었다. 뭐, 파리에 올 때도 뭔가를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닌데다가 어디를 갈 때 기대치를 높게 잡는 성격이 아닌 것도 한 몫 했지만은, 바덴-뷔르템베르크나 바이에른의 유서 깊은 고성과 동화 같은 마을이 있는 관광 도시들과 프랑크푸르트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원래 기대하지 않은 여행이 더 즐겁고 색다르다고 했던가. 프랑크푸르트로의 첫 여행이 즐거웠던 것은 일단 ‘기대하지 않은 만남’과 해프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유럽중앙은행 앞의 빌리 브란트 광장에서 한 아르헨티나 가족과 우연히 마주쳤었다. 유럽중앙은행의 상징인 거대한 유로화 동상은 도시의 랜드마크 그 자체인지라 여기서 다들 한번 씩 ‘인증샷’을 찍고 지나가는데, 문제는 이 랜드마크가 광장과 보도의 입구에 위치해서 때로는 한 쪽에서는 사진을 찍고 한 쪽에서는 지나가다가 멈춰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이제 10대에 접어든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아르헨티나 가족이 타이머를 맞추어놓고 사진을 찍는데 그것도 모르고 지나가다가 타이머 소리를 듣는 순간 황급히 뛰어서 카메라의 렌즈에서 벗어나 모두의 웃음보가 터졌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이번에는 아르헨티나 가족의 아버지가 사진을 찍어주었고, 그것을 전부로 헤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점심식사도 때우고 프랑크푸르트 전망도 구경할 겸 시내에서 가장 큰 백화점의 꼭대기 층 푸드코트에 올라갔는데, 올라가자마자 이 가족들과 눈이 마주쳤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낯선 도시에서 마주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일이 나에겐 일어난 것이다. 마침 푸드코트에 자리도 없었던 지라 이 가족과 합석을 했다. 아르헨티나의 남쪽 끝인 우슈아이아에서 온 이 가족은 아버지는 페르난도, 어머니는 파트리시아, 그리고 딸과 아들은 타마라와 토마스라고 하는데 마침 부모가 직장에서 장기휴가를 얻고 애들도 방학인 틈을 타서 약 2달 동안 유럽 여행을 하고 곧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신기하기도 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정확하게 지구 정반대에 위치해있는데, 우리는 각자의 모국에서 지구 반바퀴를 돌아 같은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아무리 프랑크푸르트가 작은 도시라고는 해도 그래도 지구상에는 7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결코 작지 않은데 우연의 여신은 결국 우리를 한 장소로 이끈 것이 아닌가. 이런 것도 인연인지라 같이 사진을 찍고 메일주소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낯선 곳에서 더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별 거 아닌 일이지만, 만남에 즐거움이 곁들여지면 짧은 순간이 긴 인연이 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고 보니 빌리 브란트 광장은 참 여러 우연의 연속인 곳 이었던 것 같다. 빌리 브란트 광장에서 나는 아르헨티나 가족을 만났고, 그리고 참으로 재미있는 캐릭터인 키오스크 아저씨를 만났다. 고층빌딩의 한 가운데에 자그마니 놓여있는 녹색의 공원인 빌리 브란트 광장은 프랑크푸르트의 중심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녹색의 쉼터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첫날엔 이곳에서 길을 잃었고, 목도 말라서 그냥 눈앞에 보이는 키오스크에 걸어 들어가서 물을 달라고 했다. 헌데 백발이 지긋한 아저씨가 나를 한번 쓰윽 보더니 일본어로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서양인들 역시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일반적이니까 말이다. 헌데 문제는 내가 너무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빠르동?(Pardon)” 이라는 프랑스어가 나와 버린 것이다. 모국은 한국일지라도 일단 지금 내가 사는 곳이 파리이기 때문에 프랑스어가 입에 붙어버린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고, 슈투트가르트와 쾰른을 여행할 때에도 당황하기만 하면 프랑스어가 저절로 나왔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진 장면에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나의 프랑스어에 아저씨가 아주 능숙하게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나이가 지긋하신 이 아저씨는 예전에 일본에서 거주하면서 일을 하던 적이 있어서 일본어에 능하시고, 프랑스 여자와 결혼해서 프랑스어를 하시고, 일본에 있던 시절 잠깐 한국에 와서 넉 달 가량 머문 적도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거주하면서 오전에는 키오스크 일을 하고, 오후에는 독일어를 배우는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부인이 프랑스 인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매끄럽게 프랑스어를 구사하셨는데, 자꾸 잊어버릴까봐 매일 일본어와 프랑스어 공부를 하신다고 하셨다. 커피도 아주 맛있게 내리셨고, 프랑크푸르트 지도를 주면서 가볼 곳도 체크해주셨다. 명함도 받았는데 이분을 다시 뵙기 위해서라도 또 한 번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더불어 ‘기대하지 않았으나 기대 이상이었던 것’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풍경! 프랑크푸르트에서 도시 전경을 볼 수 있는 곳들 중 가장 매력적인 곳 두 군데가 있는데, 아까 내가 언급한 아르헨티나 가족과 마주친 백화점 꼭대기 층의 푸드 코트 테라스와 마인 강 위에 있는 다리 위이다. 백화점의 테라스 위에서는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의 활기찬 모습과 시간의 부조화가 기묘한 매력을 자아내는 도시 구조의 내부를 한 눈에 해부하듯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고, 다리 위에서는 다른 유럽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현대식 건물과 중세풍의 교회 첨탑이 엉켜서 만들어내는 프랑크푸르트의 독특한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다. 나는 원래 야경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태까지 둘러본 독일 도시들의 풍경도 야경이 더 기억에 많이 남았지만 프랑크푸르트는 주경도 야경도 모두 선명하게 기억이 남는다. 아마도 여타의 독일 도시들과는 다른 프랑크푸르트 특유의 부조화와 마천루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낮이나 밤이나 확연하게 어떤 윤곽과 선이 또렷이 드러난다는 것은 정말 진한 인상을 주었다. 다음번에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해도 이 백화점 꼭대기에서 식사를 하고 마인 강변 위의 다리로 향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