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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프랑크푸르트/20150212-20150215] Frankfurter Karneval! 생기넘치는 사육제의 현장으로

 원래 프랑크푸르트에 온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슈태델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뒤러를 포함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부터 플랑드르 미술, 독일 표현주의 미술 등 다양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이 박물관은 비단 프랑크푸르트나 독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떨치는 곳이다. 호텔 체크아웃 시간과 기차 출발 시간까지의 간격이 있는지라 마지막말에 슈태델 박물관을 가려고 했는데, 우연히 트램에서 옆에 앉은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다가 내가 떠나는 날인 일요일에 프랑크푸르트의 사순절 카니발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역의 사물함 보관함에 짐을 맡기고, 카니발을 잠깐 구경한 후에 미술관에 들리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안이하고 헛된 꿈이었다.
















 한국에서 ‘사육제(카니발)’라고 하면 보통 베네치아의 그것을 떠올린다. 베네치아의 수상 카니발과 가면 놀이가 워낙 유명하니까. 하지만 이 사육제는 베네치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공통적으로 분포하는 일종의 계절 축제이다. 물론 파리에는 이런 것이 없지만 독일처럼 통일 이전 영방국들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는 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이 같은 축제와 퍼레이드를 실시한다. 겨울의 끝 무렵에 어서 봄이 오길 기원하는 기독교 이전 이교도의 전통이었던 축제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이제는 지역 내의 각 조합과 집단에서 단결을 꾀하는 의미에서 퍼레이드를 진행하고 한 해를 여는 행사를 하는 것으로 다소 의미가 바뀐 면도 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영향인지, 아니면 공항 노선의 영향인지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프랑크푸르트를 독일의 제 2도시나 3도시 정도로 생각한다. 베를린,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정도가 한국인들에게 알려진 독일의 도시들이고, 또 이것이 도시의 규모나 인구 순이라고 각인이 되어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물론 프랑크푸르트가 독일의 경제 수도 역할을 하고 있음과 동시에 유럽 금융의 중심지인 대표적 상업도시인 것은 맞다. 그러나 독일에서 인구 100만이 넘는 큰 도시들을 규모 순서대로 나열하면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이지 프랑크푸르트는 이에 속하지 않는다. 물론 이 네 도시 다음가는 도시가 프랑크푸르트 이기는 하지만 오펜바흐나 하나우, 다름슈타트 등의 프랑크푸르트 주변 메트로폴리탄 권역을 다 합쳐도 인구가 100만이 간신히 될까 말까 이다.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클럽의 수는 무려 3000개가 넘었다. 그 말은 유수의 상업도시이자 금융도시여도 도시의 규모 자체가 적음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적인 도시라 할지라도 수많은 작은 집단과 클럽으로 나뉘어져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 까지 속한 집단이 비교적 동질하게 유지되는 작은 사회임을 뜻한다. 






 

 이런 면에서 독일이라는 나라는 꼭 대도시일수록 수입이나 생활의 질이 올라간다는 일반적인 법칙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지역의 작은 사회가 중세의 장원처럼 유지되는 독특한 영속성이 강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로 중세의 길드나 장원이 연상되면서, 새삼 이 나라가 옆 나라 프랑스나 네덜란드처럼 혁명이나 독립전쟁 같은 하부의 주도가 아닌 상부의 힘만으로 변화한 나라임을 깨닫게 된다. 하부구조의 자발적인 변화가 아닌, 상부의 강력한 전제왕권을 주도로 수백년 동안 각기 다른 국가처럼 작용해온 수많은 지역들을 통합했으니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균열이 있었을까. 또 이로 인해 겉만 근대적인 통일국가가 되었지 내부적으로는 각 지역마다 남아있던 중세적 구조들이 그대로 잔존했을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가 속한 헤센 주만 해도 여러 개의 영방국과 도시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비록 프랑크푸르트가 헤센 주 내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큰 도시이기는 해도, 헤센의 주도는 프랑크푸르트가 아니라 비스바덴이다. 비스바덴이 본래 헤센 선제후 령의 중심이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헤센 북부의 최대 도시인 카셀은 팔츠 선제후 령 이었으며, 프랑크푸르트는 어느 선제후 령에도 속하지 않고 상업과 금융으로 번영한 마인 강변 최대의 ‘자유 도시’였다. 브레멘이나 함부르크 같은 한자 연맹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시민이 중심이 되어 자치권을 행사하던 자유 도시였고, 이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은 스스로를 헤센 주 사람이 아닌 프랑크푸르트 사람이라고 여기고 이는 때로는 비스바덴과 프랑크푸르트 사이의 미묘한 감정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한다고 한다. 현대에도 이런 면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옛날은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많이 시스템이 좋아지고 정치의 성숙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면서 독일이 지방자치의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지만, 어쩌면 이와 같은 이유들이 독일을 두 차례나 전쟁을 하도록 유도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생각해보라. 이 작은 도시에 시가행진을 하는 퍼레이드 단이 3000개가 넘는다. ‘잠깐’ 구경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닌 것이다. 퍼레이드는 나의 기차 출발 시간이 될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고, 결국 나는 슈태델 박물관을 관람하기는커녕 정신을 놓고 퍼레이드를 구경하다가 허겁지겁 역으로 돌아와 기차를 탔다. 게다가 역으로 돌아가는 길도 험난했던 것이, 트램 길이 퍼레이드로 인해 죄다 막혀버려서 뱅뱅 돌아 지하철을 찾기까지 난리 아닌 난리를 쳤었다. 다행히 친절한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타긴 했지만 말이다. 슈태델 박물관을 가지 못한 것은 참 아쉽다. 원래 프랑크푸르트에 간 목적이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하나우, 카셀, 다름슈타트 등의 도시들도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 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무언가를 ‘남겨 둠’으로써 다시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할 이유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지라 크게 서운하지는 않다. 물론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지만, 적어도 한 번은 다시 그곳에 갈 일이 있겠지. 그리고 카니발을 구경하는 인파 속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행진하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초콜렛이나 사탕이 머리 위에 쏟아지는 경험을 할 때는 나 역시 프랑크푸르터(Frankfurter: 프랑크푸르트 시민)가 된 기분과, 사람들이 자아내는 활기 및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주는 명랑함에 휩싸여서 색다른 생동감을 느꼈다. 우연으로라도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은 정말 값진 것이다. 한창 힘들 때 떠난 여행이지만, 그런 여행 막바지에 생기 넘치는 카니발을 만나고 활기찬 도시 사람들 속에 틈 타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아마 이 때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언제라도 힘이 들 때 기운을 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