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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암스테르담/20150220-20150222] 운하와 도시, "인간이 만든다"는 수식에 대한 단상








 암스테르담 관광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운하’라고 단언하다. 운하는 암스테르담의 심장이자 혈관, 다시 말해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 그 자체이다. 물론 암스테르담이라고 하면 마약과 섹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이는 유럽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고, 그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나게 파티(라고 쓰고 방종의 극한이라고 읽는다)를 즐기러 각국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방문한 시기가 한창 학기가 끝나고 유럽 전역에서 스키 방학을 떠나는 시즌이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 역시 하룻밤 거하게 놀려고 온 10대, 20대들로 가득했다. 내가 묵던 호텔에선 내 방 양 옆으로 독일인 학생들과 영국인 학생들이 묵었었는데, 특히 영국 애들 술버릇이 아주 고약해서 밤새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그런지 더 긴장이 풀어져서 술을 들이붓고는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니다가 내 방문까지 미친 듯이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결국에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확 문을 열어젖히고 한국어로 쌍욕을 퍼부었고, 그제야 조용해져 잠을 잘 수 있었다. 나중에 올리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까 그가 허허 웃으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영국인들 술버릇 나쁘기로 유명하지. 여기서 술 처마시고 소리 지르는 애들 다 영국인들이야. 마약이랑 음주, 섹스가 자유로우니까 암스테르담이 무슨 파티‘만’ 하는 그런 도시 인줄들 알지.”


 여담이지만 파리로 돌아가서 프랑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영국은 음식도 맛이 없고 음주 매너도 개판이고 잘 하는 게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뭐, 어쨌든 그렇다는 것이다. 아, 운하 이야기를 하다가 다소 길어진 감이 있지만 일단 운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운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네덜란드, 특히 암스테르담의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박물관들 중 가장 먼저 ‘암스테르담 역사 박물관’으로 향한 이유이기도 하다.







 15세기 까지만 해도 암스테르담은 카톨릭 중세유럽의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본격적인 중앙집권화가 시작되면서 절대 왕정의 길로 가기 시작한 영국, 프랑스나, 재정복 운동을 통해 이슬람을 몰아내고 강력한 중앙집권의 길을 택한 에스파냐, 혹은 교황청과 부유한 도시 국가 주도의 르네상스를 구가하던 이탈리아와는 다른 시골 동네에 불과했다. 그 당시 기독교 세계 최고의 도시이던 콘스탄티노플과 비교하면 별 거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합스부르크 에스파냐 치하의 작은 동네였다. 하지만 네덜란드, 그 중에서도 암스테르담과 홀란드 지방의 항구 도시들이 상업으로 번성하면서 전세는 바뀌게 된다. 알프스 이북의 경제가 활성화되고 한자 동맹의 전성기가 찾아오면서 네덜란드는 중계 무역 및 금융의 중심지로 급성장한 것이다. 그 중 17세기는 암스테르담이 가장 빠르게 번성한 시기로, 현재의 암스테르담의 주택과 거리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급성장하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주택난과 인구 과밀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를 해소하고 공간 사용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집의 크기, 창문 크기, 계단 개수 등을 규제한 결과 현재의 다닥다닥 붙은 장난감 같은 주택들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스페인의 통치자가 바뀌면서 네덜란드에 대한 유화 통치 정책이 강압적인 탄압으로 바뀌자 서서히 반발이 일기 시작했고, 긴장감은 유럽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최초의 국제 전쟁이자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네덜란드가 신교로 돌아섬으로써 정점을 찍는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프랑스의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독일의 쾰른 대성당같은 거대한 교회 건축이 없는데, 이는 이 시기에 네덜란드가 신교로 돌아서면서 성당을 모조리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암스테르담 시내의 교회들은 원래 구교 교회였던 것을 신교로 바꾸면서 상당히 간소화한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30년 전쟁은 독일의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에서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인해 독일은 여러 개의 영방국가로 쪼개지게 되고, 작센, 바이에른 등의 왕국과 뷔르템베르크, 바덴 등지의 중소 규모 공국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고, 라인란트 일대는 카톨릭과 신교가 혼재되어 분열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옆 나라 프랑스가 강력한 중앙집권 왕국으로 발돋움하여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것과는 상당히 대비된다. 허나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을 탄생시킨 조약이기도 하다. 흔히들 이 조약의 결과물로 프랑스와 독일의 극단적인 운명을 거론하지만, 전쟁은 또한 네덜란드와 스위스라는 유럽의 독특한 소국들을 만들어낸 또 다른 운명의 수레바퀴이기도 한 것이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만이 가지는 "유난히 튀는" 그런 것들이, 단순히 이 나라가 자유롭기만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유 시민"이 도시이자 국가 그 자체인 기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 마약과 매춘을 합법화 하고, 성에 대해 개방적이고, 일찍 독립을 하지만 범죄나 사고율은 상당히 낮은 편이고 사람들은 10대 중반부터 자립을 배운다. 이는 단순히 네덜란드 모델이 옳아서가 아니라, 오랜 역사의 과정동안 스스로 자립하는 법을 배워온 자유 시민들의 삶이 이제는 이 나라 사람들의 DNA로 정착했기 때문이겠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독립한 네덜란드는 나사우 오라녜 공이 통치하는 왕국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덜란드의 주도 세력은 왕이 아니라 상공업을 담당하는 시민들이었고, 왕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담(Dam) 광장 근처에 위치한 네덜란드의 왕궁이 프랑스나 영국의 왕궁보다 다소 소박한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인 연원에서 비롯된다. 1648년을 기점으로 암스테르담은 유럽 전역에서 버금가는 상업 도시로 성장한다. 그 유명한 동인도 회사의 전신 역시 암스테르담의 무역 회사에서 연원한 것이다.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면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능가하는 해상 무역의 거점으로 성장하면서 식민지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전 근대 시기,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촌이 생기고, 최초로 한국에 온 서양인인 하멜과 벨테브레가 네덜란드 인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할 수 있겠다. 다른 궁전들과 달리 담 광장의 네덜란드 왕궁 메인 홀에 세계지도가 그려지고 지도를 형상화한 그리스 신인 아틀라스의 모습이 보이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네덜란드와 역사와 해양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불어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왕가를 능가하는 성공적인 상인 가문과 금융 가문이 등장하고, 이들의 재력을 바탕으로 네덜란드 특유의 독특한 화풍을 자랑하는 화가들이 등장한다. 상업적 성공과 번영은 렘브란트, 베르메르, 할스 등의 걸출한 명장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운하이다. 사실 이웃한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네덜란드가 가진 자연적인 조건은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다. 비옥한 농토가 가득한 프랑스나 라인란트에 비하면 네덜란드, 특히 암스테르담의 토양은 염분과 습기가 많고 무엇보다 바닷물이 자주 땅으로 침잠해 와서 건축물을 짓기가 상당히 어렵다. 허나 유럽인들 사이에서 “신은 네덜란드에게 바다와 땅을 주었지만, 네덜란드 인들은 네덜란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방파제를 이용해 공간을 확보하고, 땅 곳곳에 있는 물길을 운하로 만들어 해양문화의 틀을 만들었다. 운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을 이용하여 역사를 만들어낸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인 것이다. 장난감 같이 작고 오밀조밀한 건물 속에, 인간이 환경과 대처하면서 성장해온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암스테르담은 “도시란 문명이 제공한 양면의 거울”이라는 한 구절이 유난히도 떠오르는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