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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암스테르담/20150220-20150222] 물과 자전거의 뜨개질 사이에서









 나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운만 좋지는 않다. 프랑스에 와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고생을 안 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긴 시간 동안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떠나기 전에 부족한 부분을 최대한 보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다. 덕분에 초기 정착을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어디 쉽나. 모국어로도 학술적인 내용들을 완벽하게 소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외국어로 이를 하는 것은 몇 배 이상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이번 암스테르담 여행이 즐거웠던 것은 모두 친구인 올리의 덕이다. 파리 생활 초기에는 발드릭이 있었고, 한참 거주 문제로 힘들었을 때는 쥐스틴과 티모가 있었고, 크리스마스의 쾰른에는 프레드와 한스가 있었고, 암스테르담에서는 올리가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적응을 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다 도와주는 사람과 믿을만한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암스테르담 여행에서는 더더욱.


 사실 암스테르담 여행 첫날에 대형사고가 터졌었다. 바로 실수로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핸드폰 액정이 깨져버린 것이다. 사실 쾰른에서도 마지막 사흘 동안 핸드폰이 잠겨서 사진은 못 남기고 눈으로만 열심히 풍경을 담았던 기억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싶은 마음으로 체념하고 있었는데, 같이 있던 올리가 자신의 옛 핸드폰과 카메라를 빌려줘서 운이 좋게 기록을 할 수 있었다.







“일단 문제가 생기면 해결 방법을 찾고 아니면 마는 거지. 게다가 핸드폰은 그저 기계일 뿐인데 말이야. ‘고치면 되지’라고 편하게 생각하는 게 맞는 거야.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에 매달려만 있기엔 우리 인생이 짧잖아?”


 씨익 웃는 그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나는 성격이 급하고 또 한 번에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파리에 온 이후로는 많이 누그러진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기계 같은 것이 고장이라도 나면 바로바로 고쳐야 불안함이 가시던 옛날과는 달리, 이제는 기계가 어떻게 되든 간에 평정심을 유지하고 일상에서의 대안을 찾아나가는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 중이다. 운명이나 우연에 큰 비중을 두지는 않지만 이곳에 와서 유난히 기계와 기술로 인한 문제가 나를 괴롭혔던 것 역시 이와 같은 과정을 배워나가고, 삶을 편안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올리의 말은 여러모로 내게 도움이 되었다. 워낙 오랜만에 만나는 지라 맥주를 시켜놓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위와 같은 해프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마음이 편한 상태였던지라 여러 가지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정서와 도덕관이라는 측면에서 네덜란드와 한국은 정말 정반대같아.”


 그 말에 나 역시 맥주를 들이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시스템의 측면에선 한국과 프랑스가 정반대이기는 하다. 프랑스는 철저하게 노동자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이고, 한국은 모든 것들이 소비자의 편의 위주로 디자인된 사회이니까 삶의 방식이나 일 처리 방식이 극과 극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어느 한쪽만이 옳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어쨌건 극단적으로 다르고, 또 그렇기에 어느 한쪽은 일방적인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면에서 약간의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사고방식 및 성이나 가족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차이보다 한국과 네덜란드의 차이가 훨씬 더 큰 것 같다. 특히 ‘금기를 어디까지 개방하느냐’라는 측면에서 이 차이는 더더욱 두드러진다.








 유럽이 전체적으로 한국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개방이 된 사회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나 영국, 독일 남부 같은 경우는 아직도 보수적인 사고관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이나 가족 등의 현안에 관해서는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개인의 자유만큼이나 가족을 중시하는 분위기라서 처음에는 꽤 놀라기도 했었다. 물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서로를 구속하고 각자의 욕망만을 투영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건전하기는 하지만, 동성애나 매춘, 마약 등의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경우는 꽤 많이 다르다. 개방화 된 유럽 사회에서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개방된 사회가 바로 네덜란드이다. 대개 17세 전후로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고, 부모 역시 자식들은 자식의 인생이 있는 것이 당연함을 인정하고 자식의 독립 이후에도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이혼이나 재혼 같은 것은 그다지 입에 오르내릴만한 소재 축에도 끼지 못한다. 누가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던지 남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준다. 성 역시 마찬가지여서 금기이기는 커녕 자연스러운 인간의 한 부분으로써 받아들이고, 엄격한 성 윤리로 인간을 구속하지도 않는다. 암스테르담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상당히 독특한 문양의 콘돔들을 팝아트처럼 전시해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네덜란드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마약과 매춘을 합법화하여 부작용 없는 양성화를 이끌어낸 유일무이한 나라이기도 하고. 독일이 매춘 합법화로 인해 상당히 많은 부작용과 인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미국과 프랑스가 매춘 소탕작전으로 인해 한해 수많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과는 사뭇 대비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매춘을 싫어해. 사람을 돈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그냥 싫어. 하지만 어쨌거나 매춘이든 마약이든 할 놈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고 말지. 그러니 차라리 양성화 시켜서 적절하게 규제하고, 사창가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하찮은 여자들이라는 편견을 쓰고 착취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매춘 합법화라고 하는 이슈 자체가 워낙 논란이 많고 여러 가지 현상들이 얽혀있는 지라 함부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저 말을 듣는 순간 왜 네덜란드만이 매춘과 마약의 양성화에 성공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로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고, 오히려 완전히 양성화 되어서 독특한 관광지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여기서는 대개 17세 정도면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고, 부모든 자식이든 각자의 인생을 살아나가. 물론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것은 부모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조금만 연락을 안 받는다거나 혹은 자신의 뜻에서 벗어난다고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통제하려 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어. 사랑하는 상대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도 당연히 친구가 될 수 있어. 편견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헤치고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라면 내 딸이 너처럼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데 스스로 이런 것 저런 것 다 잘 헤쳐 나가고 공부도 잘 하고 있다면 정말 자랑스러울 거야.”






 그 말 한마디에 긴장이 풀리고 나 역시 즐겁게 맥주를 들이킬 수 있었다. 꽤 힘들고 지쳐있던 시기에 강행한 여행이었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피로도가 집중적으로 축적된 시기라서 몸이 힘든 면이 없잖아 있는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또 다른 힘과 활력을 준 여행이었다. 물론 아쉬움을 여러모로 남는다. 릭스 박물관(Rijks Museum)을 더 둘러보지 못한 것도 미련이 남고, 하필이면 도착한 날이 내내 날씨가 안 좋고 떠나는 날에 해가 반짝 떴다는 것 역시 아쉽다. 허나 아쉬움이 있고 하고 싶은 것이 남아있으니 다시 올 구실이 생긴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는 파리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여전히 암스테르담의 집들은 작고, 사람들은 크고, 좁은 거리에 오토바이 뺨치는 자전거들이 차와 트램과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혀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싫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