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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 : 살다

"에밀레 종"의 절규

 

 

 

 오랜만에 글을 쓰는데 하필이면 유쾌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우울한 것으로 글을 쓰게 되어 마음이 다소 심란하다. 날씨도 좋으니 어디 외출이라도 나가고 싶은데, 차마 나갈 수는 없는 처지인지라 사진이라도 간단하게 올리면서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안 그래도 불행한 사고로 인해 온 나라가 슬픔으로 젖어 뒤숭숭한 가운데, 나 본인의 사정 마저도 그리 녹록치 않으니 참 뭐라 할 말이없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 더 사람 심정을 복잡하게 만드는 피맺힌 절규가 있으니 바로 "에밀레 종"의 절규이다.

 

 에밀레 종에 관한 전설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름답고 청명한 종 소리를 만들기 위해 아이를 갈아넣어 제물로 바쳐 만들어졌다는 전설. 고대에는 인신공양이 꽤 흔했고, 또 미노타우로스 전설이 있는 크레타 문명에서도 영아나 유아를 먹었다는 식인의 풍습이 있었단 증거가 발견되기도 했는데...처음에는 그저 끔찍한 인신공양 전설이라고만 생각했던 에밀레 종 이야기가 요즘 들어서 점점 현실로 느껴지는 이유는 왜 일까. 자신의 아이들을 살려내라고 절규하면서 억지로 잠수부들을 깊은 바다 속으로 밀어넣는 부모들이나, 자기 가족이 있다면서 이글거리는 화마 속으로 소방대원을 밀어넣는 사람들이나, 아이를 낫게 해달라며 간호사들과 직원들을 쪼아넣는 소아 환자 보호자들이나, 전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갈아 넣는 것 즈음은 개의치도 않는 것 처럼 보인다.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혹은 그 이득에 부여한 거창한 명칭을 위해 생명을 쉽게 소비재로 사용하는 지금의 세태와 고대의 인신 공양 세태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논어에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는 생명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적용되는 말 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기 싫으면 남도 죽기 싫은 것이고, 내 자식의 목숨이 소중하면 남의 자식의 목숨 역시 소중하다. 사고 현장에서 가족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병원에서 일각을 다투며 삶과 죽음을 오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지칠대로 지친 보호자들의 마음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니까. 그러나 자기 가족 살리자고 남의 목숨을 갈아넣어서는 안되며, 또 그렇게 남의 생명을 쇳물에 부어 에밀레 종을 만든다 해도 일이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막말로, 구조와 의료 현장의 "전문가들"을 그렇게 갈아 넣다가 나중에 전문가들 다 없어지면 결국 피해보는 사람은 자신들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라건데 더 이상은 에밀레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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