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一日 : 살다

현실같은 악몽, 악몽같던 현실이 교차하던 이틀을 보내고 뭐라고 운을 떼어야 할 지 모르겠다. 연초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13일의 공포'라는 관용구는 현실이 되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이게 정말 현실인지 악몽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아니,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현실이라기엔 너무 잔혹하고, 끔찍하고, 그리고 있어서는 안돼는 일이었다. 참사 발생 당일부터 오늘 아침까지, 꼬박 이틀 밤을 새하얗게 애 태우며 지새웠다. 집 앞의 대로변을 지나는 경찰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에 놀라 뉴스를 켜자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고, 학생조합원들의 문자를 받고 자정부터 새벽까지 서로의 안위와 소재를 확인하느라 비상연락을 돌렸다. 참극이 일어난 장소 근처의 바에서 기타리스트로 일하는 친구가 늦게까지 답장이 없어서 모두가 가슴.. 더보기
벌써 1년 2014년 10월 10일 정오, 나는 인천 공항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2014년 10월 10일 저녁 6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캐리어 두개와 함께 떨어졌다. 내 왼손 안쪽에는 출국 이틀 전에 받은 비자가 선명하게 찍힌 여권이 쥐어져 있었고, 주변에서 들리는 말이 전부 다 프랑스어라는 사실에 내 뇌는 두려움과 걱정 반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행으로 인한 피로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을 하며 터벅터벅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로 나왔을 때, 후리후리한 금발의 남자애가 내 이름이 쓰여진 종잇장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며 걸어나갔다. 한국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한 나의 친한 친구 J의 베스트 프렌드인 B와 나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 더보기
나의 두번째 파리, 그리고 길들임 방학은 끝나지 않았지만 휴가는 끝났다. 일상의 영역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점에서 나의 휴가는 끝난 것이다. 하지만 미묘하다. 집에 갔다가 낯선 곳으로 온 기분과, 낯선 곳으로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동시에 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한국에도, 파리에도 모두 길들여졌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으로 맞은 방학이자 귀국인 만큼 정신이 없었다. 휴가 갔다 온 후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한국으로 들어갔고, 가자마자 한 1주일 정도는 시차와 기후에 적응하느라 죽어있었다. 햇빛이 쨍하지만 건조해서 여름은 그럭저럭 버틸만한 파리와는 달리, 서울은 습도가 높아서 에어컨 없는 실내가 아니면 몸이 버텨내지를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필이면 내가 한국에 도착한 시기가 정확하게 딱 무더위가 시작하는 시점이.. 더보기
환상 타파 한동안 바빠서 파리 시내를 못나갔다가 오랜만에 시내를 나갔다. 소르본 근처에 마침 볼 일이 있어서, 볼 일도 볼 겸 간만에 산책도 하고 시내 구경도 하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나가자마자 바로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온도는 높은데 낮게 습기가 깔린 무거운 날씨는 둘째 치고, 일단 어마어마한 인파에 치여 한 순간 정신을 놓아버릴 뻔했기 때문이다. 아직 6월이지만 벌써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파리 시내가 평소보다 더 북적인다. 6월인데 벌써 이러니 7월, 8월 되면 얼마나 붐빌 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휴가철에는 교통 및 운송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휴가를 가서 대중교통 운행 횟수도 현저히 줄어드는데, 잔뜩 불어난 관광객으로 인해 대중교통의 밀도는 평소의 배가 된다. 이쯤 되면 상상이 가질 않는 게 아니라, 상상을.. 더보기
틈새의 묘미를 발견한다는 것 생애 첫 장기 여행을 마치고 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논문! 프랑스는 석사 1년차에도 논문을 써야 한다. 당연히 학위 논문은 아니고, 본격적인 학위 논문을 쓰기 이전에 자신의 연구 주제를 구체화하고 석사 1차를 무사히 마쳤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공부 자체는 싫어하지 않고 나름대로 즐기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외국어로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이 녹록치는 않은 지라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사실 봄 휴가 때 다들 파리에 남아서 논문을 쓰는 분위기였지만, 이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아있어도 딱히 뭐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결국 나는 기차표를 끊고 훌쩍 휴가를 떠났다. 써야 하는 논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파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딱히 두렵다.. 더보기
무엇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잠깐의 잡소리 절박함이 인생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원 중 하나임은 부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든 결국엔 가장 급한 사람이 가장 열심히 임하고, 그로인해 가장 좋은 결과를 내게 되니까. 옛 말에 목마른 놈이 우물판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게 관한 이야기는 아닌것이다. 하지만 절박함에 모든 것을 걸면서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두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개인의 선택이나 가치관에 대해 비난할 수 없다. 모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듯이 개인의 가치관과 인생 방향 설정의 자유가 있는 것이니까….더불어 이는 한 행위를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운을 길게 떼는 이유는 내가 휴가를 앞두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보기
Trocadéro, 회색의 파리 파리 생활 6개월 차에 접어든, 그리고 이제는 거주 허가까지 완료되어 체류증 까지 지닌 어엿한 파리지엔느 이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안 가본 ‘유명한’ 장소가 있었다. 바로 트로카데로(Trocadéro) 광장! 파리 만국박람회 때 전시관으로 쓰이던 샤이요 궁 북서쪽에 있는 반원형의 광장인데, 정확한 이름은 ‘트로카데로 11월 11일 광장’이다. 트로카데로라는 이름은 1823년 나폴레옹 군이 성공적으로 함락시킨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지방의 요새 이름이다. 트로카데로 요새 함락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1827년 이 광장의 이름으로써 트로카데로를 선사한 것이다. 이후 제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이를 기리기 위해 종전 날짜인 11월 11일을 광장 이름에 .. 더보기
어쨌건 총보단 펜이다 요즘 유럽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극우 정당으로 인해 난리이다. 경제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극우가 득세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위험수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중인지라 여러모로 심란하다. 사실 유럽의 극우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에 있을 때도 상당히 많이 들었다. 특히 프랑스 총선에서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창시자 장 마리 르펜의 손녀인 마리옹 마레샬 르펜이 22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어 의회에 진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했으니 말이다. 허나 이것을 멀리서 간접적으로 듣거나 보는 것과 달리, 이 상황이 실제 내가 처한 생활환경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선 가장 먼저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휴가를 갔다 오자마자.. 더보기
새해를 맞아, Bon nouvel an pour tous! 한국은 벌써 새해겠다. 여기는 아직 저녁 10시 25분, 새해가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연휴라서 그런지 파리는 평소보다 더 조용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지나다니는 차의 수 역시 눈에 띄게 적다. 모두 집에서 쉬는 연말연시 연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2014년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 이다. 생애 처음으로 모국을 떠나 타지에서 홀로 서는 삶을 시작했고, 동시에 학문이라고 하는 목표와 커리어를 위한 새로운 장에 들어섰다. 석사과정에 입학을 한 것도, 한국을 떠나 파리에서 생활하게 된 것도, 모두 내게는 새롭다. 이제 파리 생활 3달차에 접어들었는지라 많이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가 새롭고 동시에 낯설다. 하루에 한 가지 씩만 일을 처리해도 성공적인 하루라던 모 선생님의 말처럼, .. 더보기
Carnavalet 어떤 날은 겨울의 파리답지 않게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날씨가 맑다. 창문을 관통하여 부서져 내리는 햇살을 본 순간 우울하게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긴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했다고 인식하기도 전에 어느 새 난 지하철 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내린 곳은 바스티유(Bastille) 광장이었다. 바스티유는 파리의 중심부인 마레 지구와도 가까운데다 주변에 학교가 많아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더불어 그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곳이기도 하고, 시위를 한다고 하면 가장 먼저 시위대가 모이는 광장이기도 한 지라 자유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바스티유를 상당히 좋아한다. 물론 바스티유 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