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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바덴바덴/20150417-20150503] 검고, 푸르고, 반짝반짝 빛나던 날




 바덴바덴에 가게 된 계기는 별거 없었다. 마치 내가 카를스루에를 여행의 첫 관문으로 낙점한 것처럼, 그냥 지극히 사소한 계기가 있었을 뿐이다. 원래 바덴바덴이라는 지명은 책을 통해 로마 시대의 목욕탕 유적이 유명한 곳 이라고 들은 것이 전부 였다. 물론 바덴바덴을 다녀 온 주변 프랑스인 친구들이나 독일인 친구들이 굉장히 아름다운 휴양지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했고. 허나 이보다 더한 동기가 있고, 또 그 동기가 없었더라면 내가 바덴바덴을 방문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작년, 처음 독일 여행을 갔을 때 내가 택한 목적지는 슈투트가르트 였다. 11월 말,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이던 쌀쌀한 슈투트가르트의 시청 앞에 걸터앉아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가족을 만났다.


“아가씨 혹시 혼자 왔어요 ?”


 젊었을 때는 꽤 한 미모 했을 법한 금발의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귀여운 꼬마 여자아이 둘이 내가 앉은 자리 옆자리에 다가 왔고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가족은 당시 바덴바덴에 살고 있었고 주말을 맞아 슈투트가르트에 와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혼자 여행 온 나와 마주쳐 합석을 하게 되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연락처를 주고받고 간간히 연락을 하며 지내다가, 이번에 내가 봄방학을 맞아 독일로 여행을 오게 되면서 바덴바덴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더불어 아주머니의 오빠가 카를스루에에 살고 있던 지라 그렇게 6명이 바덴바덴에 모였다.







“이제부터 올라가니까 각오 단단히 하세요.”


 카를스루에에서 기차를 타서 바덴바덴에 내리고, 다시 바덴바덴 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자 케이블카가 정거하는 곳에서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꼬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난기 섞인 어른들의 말에 고개를 으쓱하며 눈을 깜빡이다가 케이블카에 탔는데, 케이블카가 슬슬 움직이고 나서야 나는 에바 아주머니가 무엇을 각오하라고 했던 지 알 수 있었다. 경사는 생각보다 높았고, 케이블카는 덜컹거려서 케이블카가 흔들릴 때마다 아이들이 꺅꺅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무섭기는커녕 너무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케이블카가 지상에서 멀어질 때마다 확대되는 아름다운 경치가 시야에 직접적으로 닿는 순간, 감탄이 연이어 튀어 나왔다. 내가 가진 빈한한 언어로는 경치의 아름다움과 자연이 주는 환희를 표현 할 수 없다. 단지 그 광경을 떠올리며 그때의 감동이 남긴 파편을 조금씩 느낄 뿐이다.








 바덴바덴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마을로 유럽 전역에서 유명한 휴양도시이다. 쨍한 햇빛과 시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 그리고 푸르른 삼림을 보자 시원하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바덴(Baden)은 욕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로마 시대 때부터 천연 온천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네로만큼이나 유명한 싸이코 황제 카라칼라가 주기적으로 온천 휴양을 즐기던 별장이 바로 이곳에 있었고, 지금도 유적과 온천이 남아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더 신기한 것은 그때의 온천이 아직도 남아서 영업 중이라는 것이었다. 유럽에 대한 선입견 중 하나가 ‘물이 석회질이고 질이 안 좋다’라는 것 이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온천이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바덴바덴을 간 날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바덴바덴은 태양과 푸른 하늘 아래에서 더더욱 빛나는 도시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읽었던 지라 슈바르츠발트라고 하면 으레 음산하게 회색의 구름과 안개가 내려앉은 숲을 생각했는데, 바덴바덴은 검은색과 녹색이 멋지게 어우러지면서 가슴을 트이게 하는 시원한 숲을 낀 도시이다. 아, 도시라고 하기도 조금 미묘하다. 마을이라고 하기엔 크고, 도시라고 하기엔 작다. 허나 이렇게 아름다운데 호칭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연 앞에선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마음의 눈을 열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녹아드는 것뿐이다.












“아름답죠? 파리와는 아주 다르죠.”


 독일인 가족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화창했던 지라 자전거를 끌고 산행을 온 커플들과 가족 단위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참 많았다. 온천과 숲으로 유명해서 워낙 휴양지로 잘 알려진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경치에 눈을 빼앗겨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근교에서 자라고, 다시 서울의 대학생활을 거쳐 파리로 오기까지 시골 생활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뼛속까지 도시인인 나이기에 슈바르츠발트의 풍경은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숲은 어둡고 잔잔하지만 태양빛과 물기를 머금으면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잉태하고 있었다. 초록빛을 잔디 삼아 그대로 태양아래에 누워버리고 싶었다.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웅대하고 두려운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포근함과 편안함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처음 느꼈었 던 것 같다.











“즐거웠나요?”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아주머니의 오빠인 마르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최대한 크게 웃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행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 장소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스스로에 대해 탐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낯선 장소에서 혼자 돌아다니면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뿌듯하다. 하지만 혼자라고 해서 모든 시간이 외롭고 쓸쓸한 것은 아니다. 혼자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지난 해 겨울의 문턱, 예상치 못한 독일인 가족과의 만남은 이렇게 다시 이번 봄에 내게 또 다른 세계를 보는 눈을 선사해주었다. 만약 내가 혼자가 아니었더라면 이 가족을 만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혼자이기에 쓸쓸하고 힘든 면도 있겠지만 혼자이기에 더 자유롭게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머니와 아저씨, 마르크, 그리고 아이들까지. 이렇게 나는 추억의 책갈피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 속에 꽂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