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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에슬링엔 암 네카어/20150417-20150503] 중세 도시에서의 재회





 슈투트가르트에 온 내가 신 궁전 광장과 재회의 인사를 나눈 후 그 다음으로 바로 한 일은 친구인 율리안(Julian)을 만나는 것 이었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우리 학교로 교환 학생을 왔었던 율리안은 지금 슈투트가르트에서 일하면서 인근의 에슬링엔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나이도, 성별도, 출신지도, 모국어도 다르지만 관심사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해서 금방 친해졌다. 율리안의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고 난 후, 약 2년 정도 연락만 주고받으며 지내다가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이!”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에 피식 웃으며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시야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들 하고, 어느 정도는 이 말이 맞다. 허나 본디 친구란 존재는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고, 오랜만에 만나도 편안한 존재가 아니던가. 오랜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재치 있는 입담과 지적인 취향을 지니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일이 잘 되길 빈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리고 그 동안의 궁금증을 한 번에 보따리 터뜨리듯 풀어버릴 기세로 이야기를 나누며 에슬링엔으로 발을 옮겼다.












 에슬링엔은 슈투트가르트의 남동쪽에 자리 잡은 도시로 슈투트가르트 시내에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 허나 슈투트가르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지닌 중세풍의 도시이다. 요행이 폭격을 피해 간 구시가지는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지금도 중세를 테마로 한 각종 행사가 종종 열린다고 한다. 10세기 말 도시가 형성되어 상업으로 번영을 이루었고, 이 번영은 15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절정에 달해 이 시기 동안 유명한 화학자와 연금술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슈투트가르트의 위성 도시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지만,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옛 시대의 흔적에는 과거의 번영이 짙게 남아있다. 더불어 그 당시에는 슈투트가르트와는 다른 독자적인 행정 체계를 가진 상인들의 자유도시였다고 한다. 같은 뷔르템베르크의 영역일지라도 직접 뷔르템베르크 공의 지배를 받았던 슈투트가르트와 달리 상인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자유도시인지라 중세 내내 고유의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지금은 한 주로 묶여있지만 독일 통일 이전의 바덴과 뷔르템베르크는 오랫동안 다른 국가로 존재해왔다. 그런지라 와인 역시 ‘바덴 와인’과 ‘뷔르템베르크 와인’으로 나뉘는데, 에슬링엔의 성벽을 따라 형성된 포도밭에도 ‘뷔르템베르크 와인’이라는 표지가 걸려있었다. 현대가 과학기술로 인해 국경이 없어져가는 시대라고는 해도, 과거 인간의 활동영역을 결정하던 구시대의 흔적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것이 새삼 느껴진다. 하기야, ‘독일(Deutschland)’이라는 나라가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1871년이지만, 뷔르템베르크와 바덴은 15세기부터 존재해 온 나라이다. 그러니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독일이란 나라의 행정구역인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보다는, ‘바덴’이나 ‘뷔르템베르크’가 익숙한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과학기술문명이 빠른 속도로 발달한다고는 해도,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정신 구조를 지배해 온 체계를 완전하게 와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변화하는 속도는 결코 물질문명의 변화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에.













 율리안의 안내에 따라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구 시가지를 가로질러 성벽을 따라 난 계단에 올라갔다. 성벽을 타고 오래된 계단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얼핏 보았을 때에는 그저 평범한 계단 같아 보이지만, 실은 설립 이후 약간의 보수를 거친 것 외에는 몇 백 년 동안 도도히 그 자리를 지킨 오래된 계단이다. 따라서 다소 좁고 가파르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은은한 역사의 흔적을 느끼는 데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생각보다 훨씬 길게 늘어진 오르막길 계단이었지만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좁은 통로를 지나면서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연신 감탄이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한국처럼 높은 산맥들이 펼쳐져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울창한 숲들이 언덕을 따라 대지를 덮어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언덕 단위로 마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지금도 걸어서 이동하는데 이만큼 힘이 든다면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언덕을 넘어 마을에서 마을로 가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니 마을 단위로 독자적인 공동체가 형성 되서 국경 비슷한 경계를 이루었을 터 이고, 이 역시 <독일>이라는 근대국가의 탄생이 늦어진 데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봐 차가운 도시여자, 어때?”


 정상에 올라가 자리를 잡자 율리안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서울과 파리, 내가 도시 생활만 한 전형적인 현대인이라는 것에 던진 농담인데 어쩐지 그 농담에 한국과 독일, 프랑스의 환경 차이가 적절하게 녹아있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의 전체 인구는 대략 8천만이지만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는 오로지 네 군데 밖에 없다.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그리고 쾰른. 이는 독일이란 나라가 대도시 위주로 집중되어 돌아가는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라, 수많은 중소도시와 시골에 인구가 흩어져 살면서 각 지역 자치를 위한 혈관처럼 작용하는 나라임을 의미한다. 율리안 역시 마찬가지로 바덴 지역과 스위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고, 한 때 서울, 파리,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살았었지만 결국은 본인에게 가장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 도시생활은 매력적이지만 너무 피곤하고, 역시 푸른 숲과 밭이 있는 곳이 좋다는 게 이유였다. 반면 나는 도시생활이 아닌 일상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에 길들여진 회색 인간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문화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가 친구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 본인의 주관적 시야와 편견에서 벗어나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태생과 모국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됨으로써 조금이나마 한계를 극복해나갈 수 있다.













 성벽 꼭대기에서 가볍게 맥주를 한 잔 하고 내려오자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구 시가지의 다른 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옛 양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건물들,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는 물결들을 실어 나르는 운하의 흔적들, 그리고 건물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익살스러운 중세의 형상들이 태양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에슬링엔을 둘러싸고 흐르는 네카어 강은 라인 강의 지류로써 지금도 강은 독일 내륙을 잇는 혈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숲과 언덕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고, 강을 따라 교통망이 형성되면서 서로 다른 마을들이 접촉하고 역사가 만들어졌다. 독일이라는 나라의 역사 때문인지, 왠지 독일의 숲을 보면 로마 군대가 게르만 부족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멸한 토이어부르크의 숲이나 억압당한 영혼과 휴머니즘을 한꺼번에 잉태했지만 결국 잔혹한 결과를 낳아버린 헤르만 헤세의 숲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에슬링엔은 아주 평화롭고 아름답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한 공기 속에 지나간 시간의 가장 우아한 조각만을 고이 내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돌과 나무가 전달해주는 숨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앞으로의 네 인생에 행운이 가득하길 바래.”


 고개를 끄덕이며 나 역시 같은 말을 했다. 역사적인 도시에서의 멋진 풍경도, 맑은 날씨와 공기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마음이 맞는 친구와의 시간이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가끔 만나도, 그 때마다 편안하고 솔직한 대화를 하고 계속 연락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인사와 포옹을 나누고 열차에 몸을 실어 숙소로 돌아갔다. 열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유난히도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