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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슈투트가르트/20150417-20150503] 도시가 내미는 다른 쪽 손을 잡다





 작년 겨울에 슈투트가르트를 방문했지만 들리지 못한 곳이 있었다. 바로 헤겔 생가. “정치란 모순의 충돌 과정을 통해 고도의 체계가 등장하고, 그 체계도 새로운 모순을 배태해 더한 고도의 체계를 만들면서 더욱 진보하는 것”이라는 변증법 이론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헤겔은 슈투트가르트 시내에서 태어났다. 헤겔이 활동할 당시에 독일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슈투트가르트는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수도였다.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바덴이 카톨릭으로 남은 것과는 달리, 뷔르템베르크 공국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대표적인 루터 교 지역으로 자리 잡는다. 구교와는 사뭇 다른 신교의 교리, 특히 검소함과 근면을 강조하는 특유의 생활방식은 상공 시민들로부터 각광을 받게 되고, 한창 상공업이 성장하던 뷔르템베르크 역시 시민들 대다수와 뷔르템베르크 대공의 지지로 루터교를 받아들인다. 이후 뷔르템베르크 공국이 왕국으로 승격했을 때에도 이는 변함이 없었고, 이에 따라 상공업 및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성장한 중산 시민 계급이 뷔르템베르크 왕국을 이루는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철학자 칸트와 극작가 쉴러, 그리고 소설가 헤르만 헤세가 이러한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신교도 가정을 드러내는 대표적 인물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한창 근대의 혼란이 유럽을 휩쓸던 18세기 말, 슈투트가르트에서 헤겔이란 인물이 태어나서 자라고 튀빙겐에서 공부를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헤겔의 생가는 슈투트가르트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표지판이 없었더라면 그곳이 헤겔 하우스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법한, 예상을 벗어나는 위치에 모습을 웅크리고 있었다. 쇼핑몰과 차도로 번잡한 거리 한 가운데에 있는 철학자의 집이라니.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대학 시절 헤겔의 별명은 ‘할아버지’였다. 또래들과는 달리 중후하고 묵직한 분위기에 말이 없고 신중한 성격인지라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어쩐지 큰 소리를 내거나 경쾌하게 걸어 다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헤겔 하우스에 발을 내딛었다. 새하얀 벽에는 예전 뷔르템베르크 공국 시절의 슈투트가르트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고, 층을 따라 헤겔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여정이 전시되어 있었다. 방 한 칸을 지나면서 옛 뷔르템베르크의 수도 슈투트가르트의 풍경과 헤겔의 흔적이 남은 종이들이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게 된다.














 헤겔이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유럽의 중심이었던 프랑스가 흔들리고, 세계의 심장이던 프랑스 왕의 목이 날아간 것이다. 역사책으로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배우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겐 별 감흥이 없는 사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겐 충격을 넘어 세계의 붕괴 그 자체였다. 왕이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시절, 왕 중의 왕이던 프랑스 왕의 목이 일개 시민들에 의해 뎅겅 잘려나간 것은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살해하는 것 이상의 충격과 파장을 낳았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 속에서, 프랑스 혁명이 더욱 과격화 되면서 혁명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과격화된 혁명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 간의 갈등은 생기고, 더불어 독일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통일 독일에 대한 논의,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떠한 정치체제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대두되면서 정신적 혼란의 시기와 철학의 전성기가 동시에 찾아온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쩌면 독일이 프로이센으로 통일되면서 겪은 이 시기의 진통이, 두 차례나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된 것일 수도 있다. 혼란 속에서 결국 지식인들은 현실과 유리되어 밀실에 갇혀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강요당했고, 그렇게 강제로 감금된 억압은 또 다른 기형을 만들어냈다. 물론 거대한 한 현상에는 단 하나의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무어라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순 없다. 다만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 조심스레 추측해볼 뿐이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저지를 수 있지만 한 번 저지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천천히 방 하나하나를 둘러보다 보니 문득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하우스가 생각났다. 조용하지만 풍요롭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던 괴테하우스는, 무겁고 진중한 공기가 지배하는 헤겔하우스와는 굉장히 다른 곳이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차이가 괴테와 헤겔이라는 각 인물이 지닌 개인적 성격의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단순한 개인차를 넘어 그들이 살아온 도시와 환경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족하고 자유분방한 상업도시의 자유 시민 가정과 엄격한 왕국의 위계질서 아래에서 금욕적인 교리를 생활신조로 살아가는 신교도 가정은 엄연히 다르다. 괴테가 자유로운 연애와 자아탐구의 과정을 거친 반면, 쉴러나 헤세, 헤겔은 끊임없이 태생적 환경에 의해 부여된 엄숙함과 외부의 폭풍 사이에서 고뇌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어쩐지 헤겔 조각상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아마 기분 탓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뷔르템베르크의 엄숙한 신교도 가정에서 자라 시대의 과제를 고민하며 살아간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의 얼굴에 고민과 수심이 가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리라.














 그렇게 한참 무거운 공기를 안고 관람을 한 후 헤겔 하우스를 빠져나오자 슈투트가르트 시내의 중심부에 위치한 마크트할레(Markthalle)가 나를 반겨주었다. 예전의 그 혼란과 전쟁의 상흔은 어디 갔냐는 듯, 마크트할레는 아주 평온하고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여름을 즐기려는 듯 노천 카페나 레스토랑에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 잠시 햇빛을 피해 쉴러 광장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 지난겨울과는 달리 맑은 날씨 아래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는 상점들의 모습, 그리고 지나가는 여행자를 위해 친히 포즈를 지어주는 한 음악가의 환한 미소까지. 그 무겁고 고뇌에 찬 역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필히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과 같은 활기와 웃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까지 그들이 거쳐야했던 지난날의 진통들이 아닐까 싶다. 그 시절, 암울하고 버거운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지금과 같이 녹지와 미소가 넘치는 도시가 있을 수 있던 것이다.













 환한 햇살과 사람들의 웃음을 보니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작년 겨울에 방문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놓친 작품이 많아 아쉬웠던 시립 미술관으로 향했다. 우연의 여신이 나를 반겨준 건지, 아니면 행운이 여신이 마침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 수요일은 관람료가 무료인 날이었다. 즐거운 마음에 경쾌하게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미술작품들을 감상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자니, 미술관에서 일하는 직원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미술을 참 좋아하시나 봐요. 이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관람하는 사람 처음 봐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연히 좋아한다고 대답을 하자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 분은 시칠리아 출신의 화가이신데 독일로 이주해서 미술관에서 일하신다고 했다. 몇 분간 여러 이야기를 하다 이분이 시립 미술관에서 일하시는 분 중에도 한국인이 한 분 계신다고 안내를 해주셔서 따라갔다. 그리고 그 분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뵙게 되네요.”


 키가 작지만 부드러운 인상이 편안한 여자분 이셨다. 독일에서 사신 지 40년이 넘으셨다고 하셨던데, 이제 은퇴를 앞두고 계신다고 하셨다. 슈투트가르트에 최근 관광객이 늘긴 했지만 한국인은 생각 외로 많지 않아서 반가우셨다며 환영해주셨다.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져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진지라 미술관 폐관 시간까지 신나게 떠들었다. 그래, 여행이란, 기대치 않은 만남으로 인해 즐거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다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오묘한 기쁨이 가슴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