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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슈투트가르트/20150417-20150503] 봄 축제의 속삭임

 

 우연히도, 내가 슈투트가르트를 여행하는 도중엔 봄 축제가 한창이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동안 코스튬 같은 독특한 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 남녀들을 봐서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알고 봤더니 한창 봄 축제 중이라서 다들 전통 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하더라. 남자들은 체크무늬 셔츠에 가죽으로 만들어진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여자들은 가슴을 강조하고 허리를 코르셋 비슷한 모양으로 졸라맨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남자들이 입는 바지는 레더호젠(Lederhosen), 여자들이 입는 의상은 디른들(Dirndle)이라고 하는데 슈바벤, 알고이, 바이에른 같은 독일 남부 지방과 오스트리아에서만 입는다고 한다.





 슈투트가르트 봄 축제가 열린 곳은 바드 칸슈타트(Bad Canstatt)이다. 19세기에 네카어 강 유역의 산업 단지로 조성된 곳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시설이 낙후되자 이를 철거하고 그 터에 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더불어 이곳이 슈투트가르트의 축제나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가을에도 이와 유사한 축제가 열리는데, 축제 장소의 이름을 따서 칸슈타터 바젠(Canstatter Wase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와 쌍벽을 이루는 독일 남부의 대표적인 맥주 축제인데, 간단하게 줄여서 슈투트가르트의 맥주 축제는 바젠(Wasen), 뮌헨의 맥주 축제는 비젠(Wiesen)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워낙 독일이라는 나라 자체가 전근대의 지방 분권주의가 강하게 남아있는 나라인지라 각 지역마다 나름의 지역 축제가 열리는데, 그 중에서도 맥주 축제는 남부의 대표적인 대도시인 뮌헨과 슈투트가르트가 가장 손꼽힌다. 뮌헨의 옥토버페스트는 1810년에, 슈투트가르트의 축제는 1819년에 시작되었고 그 이후 매년 봄, 가을마다 꾸준히 열리고 있다. 그래서 이 둘을 손꼽아 비젠과 바젠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슈투트가르트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이었는데, 이번 방문에는 봄 맥주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냥 우연이겠지만, 갈 때마다 무언가 행사가 열린다는 것이 왠지 그 도시가 나를 반겨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상당히 뿌듯해진다. 아무리 우연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방문 도시의 축제를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





 S-Bahn을 타고 바드 칸슈타트에 내리자 네카어 강이 먼저 눈앞에 펼쳐진다. 슈투트가르트는 뷔르템베르크의 손꼽히는 산업 도시였던지라 전쟁 말에 연합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고, 이 때문에 기존의 도시 구조는 거의 파괴되어버렸다. 하지만 도시를 복원하면서 최대한 환경을 살리고 녹지와 시민들이 누리는 문화 공간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힘썼고, 그 결과 자동차의 도시라는 이름답지 않게 녹색의 숲이 울창하고 강과 각종 문화시설이 조화를 이루는 지금의 슈투트가르트로 재탄생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겪고도 이렇게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과 전쟁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환경과 문화를 우선적으로 살리는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새삼 감탄을 하게 된다.















 네카어 강을 끼고 전통의상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리들을 따라 걷자 화려한 간판들과 조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본격적인 축제의 심장에 다가간 것이다. 얼핏 보았을 때에는 상점이나 음식을 파는 것이 크리스마스와 상당히 유사한 분위기처럼 보이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규모가 크고 젊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곳곳에 놀이기구들이 설치되어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따뜻한 와인과 소세지, 빵 등을 파는 겨울의 축제라면, 봄과 가을에는 계절이 바뀌는 피로감을 맥주로 풀어주고 놀이기구로 여흥을 더한다는 느낌이다. 거리 곳곳에서는 평소에는 보기 힘든 여러 가지 음식들을 팔고 있고, 인형을 상품으로 내건 사격 게임장도 심심찮게 보인다. 딱딱하고 정갈하게 정리된 슈투트가르트란 도시에서 편안하게 풀어진 채 일체의 구속이 없는 웃음을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궁전 광장 앞 잔디밭에서 상의를 훌훌 벗어던져도 철저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절대 빨간 신호등에 길을 건너지 않던 사람들인데, 축제에서만큼은 전통 의상을 입은 채 일상의 규격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만끽한다. 크리스마스 마켓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던지라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규칙과 규율로 이루어진 나라이지만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가 기계처럼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는 게 아닌지라 적당하게 긴장을 풀고 느슨하게 감정을 분출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맥주 축제가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허나 맥주 축제의 이유가 무엇이든지간에, 축제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평소의 깔끔한 독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활기와 마냥 무뚝뚝해보이던 사람들이 신나게 술을 마시고 풀어진 모습을 보는 재미는 여행 중의 백미였다.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형형색색의 놀이기구 네온사인도 충분히 귀여웠지만, 호기심이 생겨서 나도 맥주 텐트(Zelt) 안으로 들어갔다. 독일의 맥주 축제,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뮌헨 옥토버페스트를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맥주 텐트 안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추천을 했기 때문이다. 딱히 남의 말을 잘 듣는 성격은 아니지만, 뮌헨 옥토버페스트의 경우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한참 줄을 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다가 내가 가을에 뮌헨을 가지 못할 확률도 높았으므로 이번만큼은 호기심과 충고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발을 옮겼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맥주텐트는 예상을 넘어서는 광란의 현장이었다. 천막 안에는 밴드가 연주하는 신나는 리듬의 노래가 한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고,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의자 위로 올라가 어깨동무를 하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축제에 사용되는 맥주잔은 1리터인지라 꽤 무거워서 양손에 들고 돌아다녔는데, 아무래도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에 비해 외국인이 적어서 그런지 동양인은 나 하나였고 돌아다니는 테이블마다 슬그머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망설여져서 머뭇거리는 순간, 여학생이 몇몇 껴있는 자리에 떡하니 서 있던 한 무리의 남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 여기 합석해도 돼?”

“당연하지!”


 그 말에 맥주잔을 들고 의자위로 올라갔다. 아직은 앳된 티가 나는 대학생들이었는데, 축제에서 관광객을 간혹 보긴 했지만 동양인이 혼자 오는 것은 처음 봤다며 연신 질문을 해댔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아시아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설마 아시아인이 없는 지역이 있기는 한가 싶은 생각을 했었는데, 아무래도 외국인의 비중이 높은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에 비하면 슈투트가르트의 맥주 축제는 조금 더 규모는 작지만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축제라서 관광객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니 성수기도 아닌 시기에 외국인 관광객이, 그것도 여자 혼자 오는 경우는 꽤 드물 것이리라. 음악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 차 목소리를 분간하기도 힘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맥주잔은 무거웠지만 흥에 겨워 건배를 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고,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할 낯선 이들과의 술자리를 즐기며 정신없이 웃었다. 엉망에 난장판이어도 활기와 생동감이 꿈틀거리는 축제의 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인생이란, 그 때 당시에는 심각해 보이는 일도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닌 경우가 많고, 하찮아 보이는 순간의 즐거움이 오히려 삶의 활력소로 작용하며 시련을 견딜 원동력을 주기도 한다. 까맣게 내려앉은 밤을 수놓은 축제의 불빛과 웃음소리가 속삭인 말은 단순한 추억을 넘어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