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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뉘른베르크/20150417-20150503] 기다림 끝에 찾아오다

 뉘른베르크로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이번 여행의 핵심 도시가 뉘른베르크인지라 잔뜩 부푼 마음을 가지고 슈투트가르트 중앙역에 갔는데 이게 웬 걸! 기차시간표가 엉망진창이 되어있고 뉘른베르크 행 ICE 열차는 전광판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그 명성 높은 유럽의 열차 파업. 안 그래도 여행 직전에 시위와 파업으로 파리 시내 및 집 근처의 대중교통이 다 마비되는 상황을 겪었던지라 이런 쪽으로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았고, 역시나 이런 예상은 항상 들어맞는다. 하지만 호텔을 예약했고 일정이 있기 때문에 일단 뉘른베르크로 가긴 가야 하므로 직원에게 혹시 다른 방법이 있냐고 물어봤고, 이에 도이치 반 유니폼을 입은 아줌마가 일단 아우크스부르크나 뮌헨으로 가서 대체 열차를 찾아보라고 권했다. 이런 이유로 결국 나는 가고 싶었지만 시간관계상 일정에서 제외해버린 도시, 루터가 화약을 맺고 종교 전쟁을 일시적으로 휴전시킨 도시, 예정에도 없던 아우크스부르크에 가게 되었다.







 정신없이 열차에 올라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어느 새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고, 일단 내려서 시간표를 보자는 생각과 함께 짐을 끌고 역사로 나왔다. 그러나 역사에는 슈투트가르트 중앙역과 마찬가지로 ‘파업으로 모든 ICE 열차 운행이 중단 되었습니다’는 문구가 떠있는 전광판과, 망연자실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는 독일인들의 모습만이 보일 뿐 이었다. 허나 이런 광경쯤이야 어느 정도는 예상했기 때문에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파리에서 나고 자란 오리지널 파리지앵은 아니지만, 어쨌건 나 역시 파리에 거주하는 사람이다. 기습적인 시위와 파업으로 교통이 마비되는 상황 정도야 조금은 익숙하기 때문에 크게 충격 받지도 않는다. 게다가 열차 파업으로 고속열차 운행이 중단되자 도이치 반에서 일하는 직원이 친절하게 환불을 해주고, 대체 열차를 알려주기도 한다. 파리에서는 어림도 없는데. 그런 점에서는 의외로 독일이 더 친절하다.


“저기요, 제가 지금 문제가 생겼는데요....”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지금 곤란한 상황이에요.”

“나도 안다고요! 그러니까....”


 물론 썰렁한 농담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파업으로 내 권리를 주장 할 테니 네 할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는 파리의 파업에 비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훨씬 더 편리한 시스템이다. 말끔하게 생긴 푸른 눈의 도이치 반 직원이 친절하게 검색을 해서 대체 열차 수단을 알려주는 덕분에 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대체 열차 수단을 알아내고 나니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배가 고파왔다. 얼른 아우크스부르크 역내의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아그작 아그작 먹으면서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렸다. 커다란 캐리어 위에 반쯤 걸터앉아 처량하게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짠했던지, 우연히 눈이 마주친 중년의 독일인 부부가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독일인들에 비하면 왜소하고 땅꼬마 같은 애가 역사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불쌍해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푸른 무늬가 인상적인 지역 열차가 도착하자마자 올라타 잉골슈타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내렸고, 그곳에서 다시 30분가량 기다려 다른 열차를 잡아타서야 뉘른베르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2시간 걸리는 거리를 5시간 30분에 걸쳐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고속열차에 비하면 한참 느린 지역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 다소 답답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나 예뻐서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푸른 녹음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서 지평선을 이루고, 그 위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간간히 얹혀진 바이에른의 풍경은 동화 그 자체였다. 검은 빛과 녹색 빛이 어우러지던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숲들과는 달리 아주 선명한 연두색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무겁고 울창하다는 느낌보다는, 경쾌하고 오목조목하다는 느낌이 드는 숲과 농경지들이 마치 원래부터 하나의 선 이었던 모양 쭈욱 이어져서 차창 밖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파리나 서울처럼 회색에만 익숙한 현대인인 나로서는 그저 이야기 속에만 나올 것 같은 풍경들이 현실이 되어서 나를 안아주었다. 그래도 피곤하고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 잉골슈타트에서 뉘른베르크로 가는 열차에 탑승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맥주 구입이었다. 특이하게 열차 안에서 맥주를 팔고 있었는데, 너무 지쳐버려서 긴장을 풀 뭔가가 절실히 필요했고, 그런고로 커다란 맥주 한 병을 시켜서 한 번에 들이키곤 살짝 잠에 빠져들었다.







 열차를 타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달린 후 눈을 뜨자 뉘른베르크에 도착했다. 환승하기 위해 내렸던 잉골슈타트 역과 별반 차이는 없는 풍경에 별 감흥 없이 그냥 ‘도착 했구나’ 정도의 생각만 하며 짐을 끌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대부분이 자동문인 독일의 지하철과는 달리 뉘른베르크의 지하철 문은 수동이었던 것이 인상 깊어서 기억에 남는다. 중앙역에서 한 정거장 간 후 로렌츠 교회에서 내렸다. 구시가지로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로렌츠 교회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어떻게 돌길을 지나갈까 하는 생각으로 한숨을 쉰 것도 잠시,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펼쳐진 풍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캐리어를 끌고 갈 걱정 따위는 한 순간에 사라지고, 오로지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중세풍의 도시가 주는 고즈넉한 정취만이 눈과 머리를 한 가득 채울 뿐이었다.














지하철 역 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고딕 양식의 로렌츠 교회, 그리고 아담한 다리를 지나자마자 펼쳐지는 구시가지의 풍경은 지친 심신을 위로시켜주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오랫동안 기차를 기다리고 갈아탔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올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이시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이 이렇게까지 인간의 감각에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아름다움을 느낌으로써 신에게 감사하게 된다는 말을 몸소 실감하였다.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진심을 다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살아생전 이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