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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뉘른베르크/20150417-20150503] 역사와 삶이 교차하는 곳


 뉘른베르크는 아름답다. 물론 파리도 아름답고, 쾰른이나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도 아름답다. 하지만 뉘른베르크에게 부여되는 아름다움의 형용사는 조금 더 특별한 것 같다.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방문한 여타의 도시들과는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는 중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독일에서도 특히 가장 중세적인 도시이다. 중세에 지어진 교회와 상인들의 조합 회관, 성벽 등이 잘 남아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우리가 보는 뉘른베르크는 원래의 뉘른베르크와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2차 대전 당시에 연합군에게 심하게 폭격을 맞아 도시의 대부분이 전소되었고, 그 이후 복원을 해서 지금의 모습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원된 것들이 ‘가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원 과정에서 도시의 원형을 최대로 살려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정신 속에 본래의 중세 도시가 지닌 매력이 생생하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중앙시장(Hauptmarkt)과 성모교회(Frauenkirche)이다. 뉘른베르크 구 시가지에 위치한 중앙광장은 시가지의 심장부 그 자체이다. 이곳에서 집회나 공연이 개최되고, 인근 농촌 지역에서 농부들이 와서 직접 과일과 야채 및 각종 공산품들을 내다파는 시장이 열린다. 성모교회는 이 시장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교회로, 뉘른베르크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랜드마크이다.







 내가 머문 내내 중앙 광장에서는 매일 아침 시장이 열렸다. 특히 주변의 농촌 지역인 프랑켄 지역에서 직접 지은 농산물들을 들고 와서 파는 농부들이 많았다. 4월이라 그런지 딸기와 아스파라거스가 주요 농작물이었고, 사람들은 시장에 와서 이리저리 훑어보며 장을 보기에 바빴다. 한 도시와 지역의 속살을 보려면 시장을 가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시장이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장소라는 뜻이다. 뉘른베르크의 시장 역시 다른 도시의 시장들만큼이나 활기가 넘친다. 일단 바이에른 주의 제 2도시이면서, 동시에 바이에른 북부의 프랑켄 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시이기 때문에 인근 농촌에서 이곳으로 몰려온다. 따라서 시장 역시 이곳에서 가장 크게 열린다. 물론 바이에른 주의 제 1도시이자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도시인 뮌헨이 있지만, 뮌헨은 현대적인 도시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시장과 공방의 규모는 당연히 뉘른베르크가 더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뉘른베르크는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본래는 신성로마 제국 령 이었지만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사이에 상공인들과 동업조합 길드의 힘이 강해지면서 시민들이 돈을 지불하고 도시의 자치권을 산 이래 계속 자유도시로 존재해왔다. 바그너의 명 오페라인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다른 이름으로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라고도 한다)가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도시의 역사에서 유래한다. 황제나 제후, 주교의 힘보다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시민들과 길드의 힘이 강한 자유도시임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곳의 시장 역시 다른 나라의 시장들과 마찬가지로 활기차고 생기가 넘친다. 이른 아침, 트럭에 농산물을 가득 담아 싣고 와서 하나라도 더 팔려고 손님들을 불러 모으는 농부들의 모습에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힘이 느껴진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들이 촉각과 시각을 자극하고, 뉘른베르크 전통 양식으로 만들어진 지푸라기 인형들과 기념품들이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끈다. 본래 뉘른베르크와 인근 일대가 각종 장인 길드와 특산품 생산으로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책에서만 보던 문구들을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삶의 현장으로 확인하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지푸라기로 얽어 만든 동물들의 모습이 정감도 가고 귀여웠다. 아마 중세의 뉘른베르크 사람들 역시 이곳에 모여서 장을 보고, 흥정을 하고, 지역 간 오가는 소식을 교환했을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이제 마차와 전보 대신 우편과 자동차가 오가고, 사람들은 통신망으로 쉽게 연결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활기는 여전하다. 또 여전히 사람들은 시장에 모여 삼삼오오 물건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역사는 변하고 역사의 지배자 역시 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물질적인 면은 상당히 변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몸과 정신에 박힌 생활 패턴이라는 것이 변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허나 시장은 활기차고 아름답다. 시장이 뿜어내는 활기 자체만으로도 힘이 난다.














 시장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성모교회는 본래 유대인들이 살던 게토를 허물고 지은 교회이다. 유대인들을 몰아내고 교회를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상공인들의 돈으로 황제에게 땅을 샀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만큼 뉘른베르크가 상인과 조합이 강한 자유도시라는 것을 알려주는 증표인 셈이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뉘른베르크는 종교전쟁이 닥치자 신교 편에 서서 황제와 구교에 대항하는 중심축이 된다. 흔히들 바이에른은 카톨릭이 주류이고, 또 이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바이에른 북부부터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일부를 차지하는 프랑켄 지역은 프로테스탄트의 비율도 높다. 이는 이 지역이 전통적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의 힘과 자유도시 전통이 강한 지역이기에 청빈함과 근면함을 강조하는 신교의 교리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지녔기 때문이고, 또 이로 인해 결국 종교전쟁에서 황제와 선제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교 편에 서서 싸워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성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남부 독일이 재편성되면서 뉘른베르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프랑켄 지역이 카톨릭 왕국 바이에른 치하의 지역으로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흔적을 쉽게 지우긴 어려웠던 것 같다. 지금도 뉘른베르크에는 꽤 많은 수의 신교 교회가 남아있고, 프랑켄 지역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뒤섞인 혼재 지역이다. 하지만 이 무엇보다도 가장 생동감 있고 강력한 증거는 바로 시장이다. 여전히 성모 교회는 정오마다 시계탑 인형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고, 아침마다 시장이 열리면서 사람을 끌어 모은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그저 고요히 흘러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