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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뉘른베르크/20150417-20150503] 도시의 주름살 속에서

 뉘른베르크에는 도시 곳곳에 볼 것들이 펼쳐져 있다. 작은 거리와 골목 하나하나도 끊임없이 변화를 반복하는 마법의 만화경 같은 도시이다. 분명 아까 지나왔던 거리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빛의 각도와 날씨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신기한 도시이다. 마치 중세에서 시간이 멈춘 채 계속 마법의 힘으로 도시가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골목길에서 마녀나 난쟁이, 요정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도시, 뉘른베르크는 그런 도시이다.



















 사실 한국 가이드북의 뉘른베르크는 ‘중세의 정취가 느껴지지만 하루 만에 다 볼 수 있는 작은 도시’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다. 물론 잘 복원된 구시가지와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인해 독일 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볼거리들이 구시가지에 몰려있어서 둘러보는데 시간이 많이 오래 걸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번 슥 보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이 도시의 매력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도시의 풍경을 음미하고, 시간마다 햇빛으로 인해 달라지는 거리의 정취를 만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이 도시의 진가를 알게 된다. 뉘른베르크는 단순히 모양만 그럴싸하게 다듬어놓은 관광도시가 아니라, 과거의 영광과 상흔을 아우르는 역사의 영혼이 담긴 도시라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뉘른베르크는 히틀러가 가장 사랑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치 전당대회가 열렸고, 이 전당대회는 천재적인 예술가인 레니 리펜슈탈의 카메라에 담겨 ‘의지의 승리’라는 전위적인 영상으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나치와 리펜슈탈 모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상승세를 타게 된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광기는 결국 포화를 맞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에 따라 천재 역시 학살의 동조자라는 굴레를 쓰고 추방되는 운명을 맞는다. 더불어 아름다운 도시 역시 연합군의 폭격에 만신창이가 되고, 전후 도시에서는 학살자들을 처벌하는 전범재판이 열린다. 중세의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이지만, 한편으로는 불행한 역사의 한 장이 피어났다가 마감한 도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과거는 어디 있냐는 듯, 현재의 뉘른베르크는 평온하고 고즈넉한 도시이다. 마치 예전부터 변함없이 그곳에 존재한 도시 인 듯, 바깥세상이 역사의 풍파에 의해 변해가도 이곳 만큼은 결계 안에서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돌담으로 이루어진 거리와 길 하나하나에는 섬세함이 묻어나고, 아기자기한 가게의 간판들에는 중세다운 고풍스러움과 자유롭게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 특유의 위트가 묻어난다. 구 시청사는 여전히 고풍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구 시청사 앞에 자리한 귀족 저택인 나사우 하우스는 내가 갔을 땐 공사 중 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 자체가 풍기는 아우라와 벽의 그림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평화로운 풍경이 한 때 광기와 잔혹함을 낳고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마치 누구도 뚫을 수 없는 마법의 결계 속에서 시간이 멈춘 채 그대로 정체된 도시를 보고 있는 것 같았기에 더더욱.














 허나 이러한 환상과 감상도 잠시, 호기심에 이끌려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교회 건축은 중세도시와 지극히 잘 어울리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서 한 무리의 관광객들을 만나는 순간 ‘아, 이곳은 마법에 갇힌 도시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 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모 교회 외에 뉘른베르크를 대표하는 교회로는 성 로렌츠 교회와 성 제발두스 교회를 들 수 있다. 둘 다 뉘른베르크의 수호성인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교회이다.











 성 로렌츠 교회는 뉘른베르크의 구 시가지를 관통하는 쾨니히 거리에 위치한다. 뉘른베르크 구 시가지의 입구로 향하는 지하철역도 바로 이곳에 위치해있다. 내가 처음 뉘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 본 건축물 역시 이 성 로렌츠 교회였다. 구시가지에 위치한 호텔로 가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이곳을 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고딕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교회의 매력은 역시 푸른색의 뾰족한 첨탑이다. 얼핏 보기에는 쌍둥이처럼 똑같은 대칭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가 난다. 1270년에 짓기 시작해서 1477년에 완공하였다고 하니 무려 200년에 걸쳐서 지어진 셈이다. 처음에 뉘른베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이 건물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파업으로 인해 기나긴 길을 돌아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시야에 보인 뾰족한 첨탑 위에는 석양이 내려앉아 있었다. 허나 날씨 좋은 날, 기운을 얻고 다시 본 로렌츠 교회는 활기가 넘치는 현실의 공간 그 자체였다. 로렌츠 교회 앞 광장은 뉘른베르크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약속 장소이자 상점가이다. 고딕 양식의 교회는 고고하고 우아하게 서있지만, 다른 시간을 사는 듯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닌 활기찬 모임의 장으로써 시민들의 삶과 공존하고 있다. 영광스러운 중세의 전성기와 불행한 나치 시대의 역사는 이제 역사일 뿐,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를 사는 인간의 삶 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반면 구시가지 근처의 성 제발두스 교회는 아주 조용하다. 숙소가 이 근처였기 때문에 매일같이 지나친 곳이기도 한데, 로렌츠 교회보다 약간 앞선 1225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150년에 걸쳐서 지어진 교회이다. 지어질 당시의 건축 양식이 반영되어서인가, 완전한 고딕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로렌츠 교회와는 달리 약간의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이 가미되어있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얼핏 보기엔 둘이 비슷해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활기가 넘치는 로렌츠 교회와 비교하면 아주 고요하고 고즈넉한 교회이다. 처음부터 이 교회가 성 제발두스에 헌정된 것은 아니지만 1424년 제발두스가 성인으로 추앙되면서 그의 유해가 안장된 이 교회로 순례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뉘른베르크가 상업도시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성 제발두스는 종교적 이유로 성인으로 추존되었어도, 결과적으로는 뉘른베르크에 있어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 준 수호신인 것이다. 지금도 뉘른베르크 사람들은 성인들 중 그를 가장 존경하고, 교회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는다. 







 성인들과 신의 시간이 지배하는 시대도 가고, 광기와 폭력이 지배하는 시대도 갔지만, 여전히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성인을 믿는 시민들의 삶은 계속된다. 시시각각 햇빛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이는 만화경 같은 도시 뉘른베르크,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중세의 고도 뉘른베르크, 아름답지만 불행한 현대사의 시작과 끝을 간직한 뉘른베르크,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남부 독일의 현대 도시 뉘른베르크. 이 모든 것은 존재했고, 또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한낱 스쳐가는 여행자에게도 선뜻 영광과 상처를 한 번에 보여주는 이 도시를 잊기란 불가능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