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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레겐스부르크/20150417-20150503] 처음만난 도나우 강, 새하얀 보석

 뉘른베르크에서 당일치기로 레겐스부르크에 간 날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독일의 4월 날씨가 워낙에 변덕을 부렸던 지라 은근히 걱정을 했었지만,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햇볕이 쨍하고 공기가 따뜻했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속의 녹색은 내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역에 내리는 순간 적당하게 따스한 태양과 아름다운 대리석의 거리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도시 곳곳을 날아다니듯 걸어 다녔던 것 같다.







 레겐스부르크는 도나우 강과 레겐 강이 만나는 강 하구 어귀에 자리 잡은 도시이다. 도시의 이름 역시 레겐 강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도나우 강 역시 끼고 있기에 독일에서는 ‘도나우 강의 레겐스부르크’라는 의미로 ‘레겐스부르크 암 도나우(Regensburg am Donau)’라고도 부른다. 프랑켄 지역에 위치한 뉘른베르크, 뷔르츠부르크, 밤베르크와는 달리 레겐스부르크는 바이에른에 속한다. 더불어 전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연고지인 만큼 카톨릭의 세와 전통이 강한 도시이다. 본래는 로마 시대의 요새이던 라티스 보나(Ratis Bona)에서 기원한 도시인데, 게르만을 비롯한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도나우 강 전선을 형성하던 중요한 요새였다. 로마의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와 그 동생 드루수스 역시 이 게르만 전선에 복무했는데, 특히 드루수스는 도나우 강 요새 방어를 탁월하게 해내고 게르만을 제압하여 ‘대(大) 드루수스’라는 명칭을 얻기도 했다. 이후 로마 제국이 무너지자 이곳은 혼란 지대가 되었다가 7세기에 수도원이 건립되면서 카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가 형성되고, 샤를마뉴 치하의 시기를 거치며 확고한 카톨릭 도시로 자리 잡게 된다. 종교전쟁 당시 신교 편에 섰다가 금방 구교로 돌아선 것도 이와 같은 도시의 전통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도시 곳곳에서는 종교적 향기가 감돈다. 쾰른 대성당처럼 크지는 않지만, 웅장함과 섬세함에는 뒤지지 않는 레겐스부르크 대성당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건물들 사이로 비죽 올라온 레겐스부르크 대성당의 첨탑을 볼 수 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얀 눈으로 만들어진 산이 아기자기한 건물들의 지붕 위에 내려앉은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그을린 흔적이 역력한 쾰른 대성당과 달리, 레겐스부르크 대성당은 새하얗다. 꼭 성모 마리아의 수의를 연상시킨다. 레겐스부르크는 2차 대전 당시 항공기와 전투기를 생산하는 전초기지였지만, 천운으로 구시가지는 연합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연으로 인해 구시가지의 역사적 건물들과 대성당은 파괴되지 않고 원형을 보전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은 이럴 때 가장 적절하게 들어맞는 것 같다.














 자유로운 상인들의 세속적인 도시인 뉘른베르크와는 달리 레겐스부르크는 조금 더 엄숙함이 감도는 도시이다. 뉘른베르크의 교회들과는 달리 장중한 위엄을 갖춘 성당이 도시의 첫인상인 만큼 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고, 나아가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왕들의 흔적이 엄숙함을 더해준다. 하지만 레겐스부르크도 뉘른베르크 못지않은 활기가 있는 도시이다. 도나우 강의 중요한 항구인지라 대항해 시대 전개 이전까지는 독일의 주요 거점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내륙항 이자 물자 중심지였고, 상공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도시였다. 지금도 레겐스부르크는 독일의 주요한 선박업 중심 도시 중 하나이다. 또한 문화의 도시이기도 하다. 교회 음악의 정수를 교육시키는 교회 음악학교가 있고, 7세기 이후부터 수도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 카톨릭 도시인만큼 중세 카톨릭 교육의 전통을 간직한 도시이기도 하다. 교황 베네딕트 16세와 그 형이 이곳에서 활약했고, 화가 알트도르퍼와 천문학자 요한네스 케플러도 이곳에서 활동하다 세상을 떠났다.










 레겐스부르크는 아름답다. 엄숙함만이 감도는 대리석의 도시 같지만, 한편으로는 거리 곳곳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활기가 햇빛과 함께 부서지면서 퍼지는 모습이 피부를 간질인다. 종교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의 도시라는 것이 느껴지지만, 결코 그것이 압박감으로 작용하진 않는다. 이곳의 상징은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새하얀 대성당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도나우 강가에서 본 도시의 전경이다. 가까이서 봤을 때는 그렇게도 엄숙해보여서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것만 같았던 대성당이, 도나우 강가에 앉아서 보는 순간에는 파란 하늘과 겹쳐지면서 반짝거리는 향기로운 꽃으로 변한다. 성모 마리아가 지상에 내려와 꽃을 파는 처녀로 변한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이다. 하늘은 파랬지만 따뜻했고, 태양은 강렬했지만 뜨겁진 않았다. 역사와 신앙이 남아있는 도시는 경건했지만 산뜻하고 활기가 넘쳤고, 그 야릇한 조화가 주는 안정감에 나 역시 도나우 강변의 잔디위에 드러누워 한껏 경치와 공기를 만끽했다.











 이방인은 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강물에 발을 담근다. 자동차와 사람으로 붐비는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기에, 잔디에 앉아 강물에 발을 담근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레겐스부르크의 시민들에겐 그저 일상일 뿐이다. 날씨가 좋으니 으레 예전에도 그랬듯 도나우 강가의 잔디밭에 앉아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무거운 옷들을 벗어던지고 스포츠에 열중한다. 한낱 이방인에게는 경이로운 풍경일지라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나우 강과 함께 살아온 레겐스부르크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순환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광경들이 그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기에 도시의 가치는 더 빛을 발한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위에 비쳐진 역사의 흔적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숨결이 있기에 아름답다. 레겐스부르크는 경건하고 진지한 사람들의 도시이지만, 동시에 도시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도나우 강이 선사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