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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世 : 느끼다

[뉘른베르크/20150417-20150503] 성벽에서 밤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낼 때

 뉘른베르크의 정취를 더해주는 것은 역시 성벽이다. 구시가지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벽은 중세의 느낌을 한껏 풍기면서, 동시에 뉘른베르크의 구시가지가 지닌 고전적이면서 동화 같은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11세기 즈음에 적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해 이후 조금씩 변화하면서 뉘른베르크를 보호하는 갑옷의 역할을 해왔다가,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 지금의 성벽이다. 성벽은 지난한 역사 속에서 꾸준히 뉘른베르크를 보호해준 갑옷이자 방탄조끼이며, 동시에 이제는 역사적 아름다움으로 많은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상징물이다.

 

 

 

 

 

 

 

 

 뉘른베르크를 떠나기 전, 여전히 보지 못한 것들과 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벽은 꼭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천천히 산책을 하며 성벽에 올랐다. 말이 성채이고 요새지 산악국가 출신인 나에게는 그냥 야트막한 언덕 정도에 지나지 않는 지라 가뿐하게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밤베르크 꼭대기나 뷔르츠부르크 마리엔베르크 요새에 비하면 정말 쉽게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올라가는 길과 꼭대기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올라갈 때에는 예전에 다니던 학교 언덕을 올라가듯 가볍게 올라간 지라 그다지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막상 올라와서 성벽에 기대어 도시의 전경을 보는 순간 완전하게 다른 느낌이 온 몸에 벅차오른다. 그저 경사가 조금 더 기울고 땅에 몇 발짝 떨어졌을 뿐인데 시야를 채우는 세상은 전혀 다르다.

 

 

 

 

 

 

 

 

 

 

 성벽에 기대어 보는 도시는 새삼 새롭다. 파리에서도, 뷔르츠부르크에서도, 밤베르크에서도, 밑에서 보는 도시와 위에서 보는 도시는 다르다. 꼭대기에 내려다보는 도시의 모습은 너무 비현실적임과 동시에 익숙했던 거대한 건축물이 미니어처처럼 작아지면서 낯설음을 선사한다. 한낱 인간에겐 너무나도 도도하고 웅장한 천국의 관문인 교회의 첨탑이 숟가락보다도 더 작아지는 현상은 이질감을 자아낸다. 원근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데, 원근법이나 관련된 과학적 지식들이 전혀 없었던 중세 사람들의 눈에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영주와 주교만이 높은 곳에 거처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잠깐 해본다. 거대한 첨탑을 작은 존재로 만들 수 있고, 도시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는 현세의 신과 같은 존재는 영주와 주교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높은 곳은 그 자리가 지닌 위엄과 상징만으로도 충분히 ‘신’이 가진 그것에 필적하는 장소였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도시를 보기는커녕, 평생 단 한 번도 높은 곳에 올라오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저 교회의 높은 첨탑만을 보며 기도를 하면서 지금의 삶은 고단하고 힘들어도 언젠가는 저 첨탑을 타고 천국에 갈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 그들의 삶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신보단 과학기술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회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계급이 생긴 대신, 사회 전체를 지배하던 ‘보이는 위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에 따라 공간이 가지는 신성함이나 상징성 역시 함께 소멸하면서 성벽 위에 자리 잡은 도시 꼭대기 역시 과거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되었다. 오늘 날, 뉘른베르크의 성벽은 날씨 좋은 날 시민들에게 환상적인 전경을 제공하는 휴식처이자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 주요 관광지가 되어있다. 이곳에서 보초를 서며 적의 침입을 경계하던 군인들도, 성 꼭대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던 영주와 주교도 이제는 없다. 단지 현재라는 순간이 주는 찬란함을 즐기며 햇빛을 만끽하는 사람들과, 흔적을 보며 애써 과거를 추적하려 하는 이방인만이 자리를 채울 뿐이다.

 

 

 

 

 

 

 

 

 

 

 

 성벽 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뉘른베르크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이 성벽을 오르며 산책을 하고 중앙광장과 성모교회에 들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쉬움이 남았고 지금도 그대로 뉘른베르크는 내 마음속에 머무르고 있다. 환희, 경이, 감탄, 기쁨, 그리고 아쉬움까지 모두 함께. 뉘른베르크의 마지막 밤에, 나는 다시 성벽을 올랐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고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떠난 장기 여행의 목적은 뉘른베르크라는 아름다운 고도를 보기 위함이었고, 발로 직접 걸어 다니면서 도시의 구석구석을 담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내 기대는 무너져버리고, 외려 도시가 나를 끌어당기면서 내가 도시에 폭 파묻혀버렸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동안만큼은 난 뉘른베르크라는 도시 자체에 녹아들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막상 떠나려고 하니 어쩐지 내 몸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허전함이 들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와 호텔 뒷골목을 천천히 산책하며 언덕을 올랐다. 밤에 보는 성벽과 탑의 모습은 낮에 본 모습과 너무 달랐는데, 이는 낮의 성벽이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의 공간인데 반해 밤에는 마치 중세 시대 사람들이 조용히 요정들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아무도 없는 성벽 위에서 홀로 턱을 괴고 앉아 야경을 보는 것은 매우 황홀했다. 뾰족한 첨탑도, 붉은 벽돌 건물들도, 고즈넉한 중세양식의 건물들도, 모든 것들이 밤의 어둠속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 홀로 성벽을 다 전세 낸 양 걸터앉아 야경을 독차지하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사람들도 이 풍경을 보면서 나와 같은 것을 느꼈을까? 아니다, 그 때에는 전기가 없었으니 밤이 되면 모든 것이 새까맸겠지. 시간은 참 빠르고 야속하게도 나는 아름다운 뉘른베르크와 작별을 할 시간이다. 여행은 즐겁지만, 여행지를 떠나야하는 것은 슬프다. 과연 나는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아무도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뉘른베르크에 다시 올 수 있다고 확실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나는 한참동안을 성벽 위에 앉아서 밤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중앙광장의 성모 교회 시계탑 인형의 작별을 받으며 뉘른베르크를 떠나 뮌헨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