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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 : 살다/彿國記

나의 두번째 파리, 그리고 길들임

 방학은 끝나지 않았지만 휴가는 끝났다. 일상의 영역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점에서 나의 휴가는 끝난 것이다. 하지만 미묘하다. 집에 갔다가 낯선 곳으로 온 기분과, 낯선 곳으로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동시에 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한국에도, 파리에도 모두 길들여졌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으로 맞은 방학이자 귀국인 만큼 정신이 없었다. 휴가 갔다 온 후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한국으로 들어갔고, 가자마자 한 1주일 정도는 시차와 기후에 적응하느라 죽어있었다. 햇빛이 쨍하지만 건조해서 여름은 그럭저럭 버틸만한 파리와는 달리, 서울은 습도가 높아서 에어컨 없는 실내가 아니면 몸이 버텨내지를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필이면 내가 한국에 도착한 시기가 정확하게 딱 무더위가 시작하는 시점이었고, 한국에 도착하기 전 불과 이틀 전에 거닐었던 프랑스 서부의 항구도시 라 로셸은 20도 안팎의 서늘한 날씨였던지라 더욱이나 기후 적응이 힘들었다. 하늘에서 지구를 향해 거대한 가습기를 틀어놓은 것 마냥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점성을 띈 습기들이 끈적하게 내 몸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그 느낌이 너무나 싫었다. 심지어 돌아오는 비행기 편에서 시끄러운 승객들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해 시차적응이 너무 힘들었고, 돌아오자마자 쏟아지는 각종 오지랖들과 여러 가지 서글픈 소식들 때문에 한국에 왜 왔는가 짜증내고 후회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유난히 올 해 별의 별 일들이 많았던지라 여러모로 나 스스로 내 자신과 주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마련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파리에 살면서 한국이 얼마나 자동화된 기술사회인가를 느낌과 동시에 얼마나 각박하고 건강하지 못한 사회인가를 느꼈고, 반대로 한국과 비교해서 프랑스가 얼마나 처절하게 식민 지배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지를 느끼며 제국주의는 동경의 대상이 아님을 실감했으니까 말이다. 군대에 복무하고 있는 남동생을 만나고 험준하게 굽이치는 산맥과 마주한 검푸른 바다를 보면서 그 동안의 나의 삶과 지금의 나의 삶, 그리고 앞으로의 나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과거에 내가 받았던 상처들을 한 번 더 씻어 내릴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던가. 상처를 완전하게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생체기 위해 반창고와 딱지가 쌓이면서 서서히 무뎌지게 단련되는 것은 가능하다고. 나 역시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지라 그저 내가 더 무던하고 덤덤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한 달 하고도 2주라는 시간은 너무 금방 지나가버려서, 막상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때가 다가왔을 때에는 “어, 뭐야? 벌써 그렇게 되었나?” 라는 말과 함께 머리만 긁적였다. 부랴부랴 짐을 쌌을 때도 별 느낌은 없었다. 단지, 작년과는 달리 ‘집을 떠난다’는 느낌만 든 것이 아니라 ‘집에 돌아간다’는 느낌도 강하게 들었다는 것이 조금 더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항상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디론가 떠날 생각만 했던 나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한국도 편안한 나의 집 같고, 동시에 처음에는 그냥 낯설고 어지럽기만 하던 파리 역시 이제는 익숙한 나의 보금자리라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릴 때는 독일이나 남프랑스, 이탈리아, 암스테르담 등지로 휴가를 갔던 것처럼 그냥 한국으로 여행 갔다는 느낌이 들겠거니 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지만, 그 보다는 더 느리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휴가보다는 말 그대로 ‘고향에 잠시 돌아왔다’는 느낌에 더 가까울 것이다. 단지 이제는 한국도 파리도 내 집이라는 것이 전과는 다른 점일 뿐.





 파리에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의 매력과 장점은 간단한 것만 추려도 책 한권으로도 모자라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곳이 파리라는 것이다. 나는 고향에서 느리게 늘어지는 시간을 보내면서 묵은 먼지를 씻어냈고, 이제는 나를 길들이고 익숙하게 만든 도시로 돌아와 미래의 삶을 위해 현재를 살고 있다. 나는 서울을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서울에 길들여지는 데는 썩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서울의 방식에 익숙해졌을 뿐. 그러나 파리는 나를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내가 돌아오는 곳이 파리라는 것에 뿌듯함과 기쁨을 느끼게 된 그 순간, 지난 봄 방학 여행이 끝난 그 순간부터 나는 파리에 길들여진 것이다. 언젠가는 내 발자국이 닿는 모든 곳에 나를 길들일 수 있으리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