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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 : 살다/彿國記

틈새의 묘미를 발견한다는 것

 생애 첫 장기 여행을 마치고 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논문! 프랑스는 석사 1년차에도 논문을 써야 한다. 당연히 학위 논문은 아니고, 본격적인 학위 논문을 쓰기 이전에 자신의 연구 주제를 구체화하고 석사 1차를 무사히 마쳤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공부 자체는 싫어하지 않고 나름대로 즐기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외국어로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이 녹록치는 않은 지라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사실 봄 휴가 때 다들 파리에 남아서 논문을 쓰는 분위기였지만, 이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아있어도 딱히 뭐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결국 나는 기차표를 끊고 훌쩍 휴가를 떠났다. 써야 하는 논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파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딱히 두렵다거나 짜증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상이 있어야 여행이 존재하는 것이고, 여행이 있어야 일상이 재밌는 것이 아니던가.


 처음 떠나는 장기 여행이었던 지라 상당히 많이 걱정했지만, 우려와는 달리 여행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물론 파업과 열차 지연 등 소소한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고, 아름다운 풍광들과 마주하며 복잡한 고민들을 털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도시 생활에만 익숙한, 전형적인 현대 도시인인 내게 있어 작은 사회들로 이루어진 남부 독일의 목가적인 풍경은 또 다른 감상을 안겨주었다. 아마 이번 여행이 아니었다면 내가 농촌 생활이나 작은 공동체들의 생리에 대해 생각할 기회는 거의 없지 않았을까 싶다.





 논문을 쓰다가 머리를 식힐 겸 여행기를 틈틈이 정리하고 있는데, 사진과 메모들을 보며 지난 기억들을 되살리고 있자니 느낌이 새롭다. 그 때의 나는 파리로 돌아가서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을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던 자유롭고 젊은 영혼이었는데, 파리로 돌아오고 나니 어느 순간 일 분 일초를 놓치지 않으려는 빠른 걸음으로 회색 도시를 질주하는 현대인이 되어있다. 허나 나쁘지 않다. 녹색으로 가득한 독일 시골의 여유로운 풍경을 좋아했던 것만큼이나 나는 파리 생활을 좋아한다. 그리고 분명 나라는 사람에게는 독일의 시골보다는 파리가 일상생활 공간으로써 더 적합한 곳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시골생활보다는, 조금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익숙하고 재미거리가 넘치는 도시생활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뮌헨 중앙역에서 파리 동역에 도착하는 순간 펼쳐진 엉망인 광경들이 익숙하면서도 반갑기까지 했었으니 이젠 파리에 많이 길들여진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임승차나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 오래되고 낡아서 냄새나는 지하철 역, 그리고 보다 다양해진 길거리 사람들의 얼굴색깔까지. 17일간의 부재 후 다시 만나니 이 모든 것들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더라. 


 여행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상이 싫은 건 아니다. 독일의 도시들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웠지만, 이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고 해서 내가 파리나 서울같은 대도시를 떠나고 싶어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내가 생활하는 공간에서 당장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서 살기 위한 원동력으로 여행을 꿈꾸는 것이다. 여행이란, 내가 삶을 사랑하려고 하는 노력의 축인 것이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힘들고 짜증나고 지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많은 것을 누림과 기회를 만들어갈 힘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더불어 여행이라는 즐거움을 만날 수 있던 나의 행운에 대해서도. 어쨌거나 할 일은 해야하고, 난 또 다시 여행을 갈 생각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도시 파리는 내게 기회와 시련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여러가지 행운을 보여주기도 하는 만화경같은 도시이다. 여행을 끝내고 귀가해 집 창문을 보는 순간 눈에 들어오던 에펠탑의 형상이 어찌나 정겹던지....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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