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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 : 살다/彿國記

환상 타파



 한동안 바빠서 파리 시내를 못나갔다가 오랜만에 시내를 나갔다. 소르본 근처에 마침 볼 일이 있어서, 볼 일도 볼 겸 간만에 산책도 하고 시내 구경도 하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나가자마자 바로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온도는 높은데 낮게 습기가 깔린 무거운 날씨는 둘째 치고, 일단 어마어마한 인파에 치여 한 순간 정신을 놓아버릴 뻔했기 때문이다. 아직 6월이지만 벌써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파리 시내가 평소보다 더 북적인다. 6월인데 벌써 이러니 7월, 8월 되면 얼마나 붐빌 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휴가철에는 교통 및 운송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휴가를 가서 대중교통 운행 횟수도 현저히 줄어드는데, 잔뜩 불어난 관광객으로 인해 대중교통의 밀도는 평소의 배가 된다. 이쯤 되면 상상이 가질 않는 게 아니라, 상상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







 다른 도시에 비해 파리는 유난히 연인이나 커플 단위 관광객이 많다. 프라하도 그렇다곤 하지만, 아직 프라하를 가보지 않아서 이거에 대해선 뭐라 말 할 거리가 없다. 허나 확실한 건, 관광이든 다른 목적이든, 일단 파리에 오는 사람들 대다수는 ‘환상’을 가지고 파리에 온다. 몇 달 전 친구들이 파리에 와서 집에 머물렀을 때에도 그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 명은 프랑스인, 그리고 한 명은 폴란드인 이었는데, 같은 유럽 연합 소속 국가 출신일지라도 일단은 파리에 대한 환상은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아름답고, 고상하고, 우아하고, 낭만적이고, 일종의 여성적 로망을 한데 모아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시킨 것 같은 도시라는 이미지이다. 아마 대다수는 파리라고 하면, 낮에는 우아하게 오페라 케이크와 마카롱을 먹고, 식후에는 에펠탑 주변에서 휴식시간을 가지고, 저녁에는 라파예뜨나 프렝땅 같은 대형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삶을 떠올릴 것이다. 특히나 관광객이라면. 혹은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디즈니랜드에 가는 것을 꿈꿀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아니다. 외식비용이 비싸서 어쩌다 매일 외식을 한다는 것은 꿈일 뿐 한 번 외식하기도 버겁고, 에펠탑은 그저 날씨 좋을 때 예뻐 보이고 가끔씩 놀러 나가서 보는 기념물일 뿐이고, 라파예뜨나 프렝땅은 어마어마하게 비싼데다 거주지와는 거리가 있어 특별한 날 외에는 잘 가지 않는 장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리의 상징으로 거론되는 존재들은 실제 파리지앵의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외식비가 워낙 비싸서 빵집이나 마트에서 아주 간단한 요깃거리만 사가지고 끼니를 때우는 학생들이 대다수이고, 그게 아니면 저렴한 가격에 식사가 제공되는 학생 식당을 간다. 외식은 어쩌다 특별한 저녁에만 할 수 있는 특별한 행위이고, 설령 약속이 있다 하더라도 술 한 잔 정도 시켜놓고 5시간 내내 이야기만 줄창 하다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화려한 레스토랑에서의 외식보다는, 장바구니 수레를 끌면서 이것저것 장 볼 거리들을 집어 담아 끌고 다른 한 손에는 바게뜨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더 파리지앵의 실제 모습에 가깝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그들이 불행한 것도 아니고, 그들과 같은 규칙 하에 살아가는 내 자신의 삶이 불만족스럽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레스토랑이나 으리으리한 명품관이나 백화점에서 저녁을 보내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자신의 의지대로 행복하게 보내는 개개인의 삶이 진짜 주인공의 삶이라는 것을.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무리 엘리트들이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상류층의 힘이 강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 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아파트 관리인이나 도서관 청소부와도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고 느리지만 자기가 할 일은 제대로 하고, 그리고 다양성과 자유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높게 평가된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 학교를 나왔거나 혹은 얼마나 많은 돈이 있느냐가 아니라 각자 얼마만큼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느냐이다. 그것이야말로 파리지앵들이 파리를 사랑하고, 파리라는 도시가 가치를 갖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 거리는 지저분하고, 집시와 소매치기들이 호시탐탐 지갑을 노리고, 낭만적이고 공주스러운 환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다양성과 자유가 존중되기에 파리를 사랑한다. 이는 환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실제의 삶과 일상에 대한 애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