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探利 : 생각하다

문명과 삶으로써의 도시 (1) 고찰명, 중국 도시 이야기 & 도시로 보는 유럽 통합사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대다수, 아니 지구에 살고 있는 인구의 대다수는 도시에 살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도시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필자와 마찬가지로 ‘도시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도시라고 하는 것이 꼭 현대 과학기술문명의 결과물인 것 같지만, 사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도시는 인간 집단을 보호하고 구성원들을 조절하는 울타리로써 쭉 존재해왔다. 5천년도 더 전인 신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차탈휘육 역시 도시였다. 도시는 수많은 구성원들을 보호해주고,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서 일체감을 가지게 하고, 정치라는 사회적 작용을 만들어내고, 인간을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이다. 설령 인간이 모여 살았다 하더라도 도시라는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인간은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도시는 일종의 블랙홀과 같아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며 자신의 내부로 이끌고, 동시에 도시에 사는 인간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필요를 느끼도록 유도하여 새로운 발명품들을 창조해내는 힘을 제공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문명을 확장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도시와 과거 전근대의 도시가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불확정성이 가중 된 시대이기 때문에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지니고 있던 시대와 함부로 비교할 순 없다. 허나 그 때나 지금이 변하지 않은 것은 도시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을 이끌고 새로운 변화의 힘과 가치의 창출을 유도하는 중심점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울로, 상해로, 북경으로, 도쿄로, 오사카로, 파리로, 뮌헨으로, 런던으로, 뉴욕으로! 사람들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과 열망을 안고 도시로 몰려든다. 그리고 도시는 그런 사람들을 흡수하면서 또 다른 시대를 잉태하는 요람으로 변화한다.

 

 위의 두 책에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유럽과 중국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을 다루고 있고, 도시를 보는 시각 역시 다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책들을 한꺼번에 묶어서 다루는 것은 역시 ‘도시’라고 하는 공통의 카테고리에서 인간과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유럽이나 중국이나, 한국인들에게는 꽤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대상이다. 전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선진문물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으로, 후자는 인접하고 친숙하지만 동시에 전근대의 종주국이라는 점과 낙후된 현대라는 양면성이 공존하는 대상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강한 것 같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잘 아는 것’ 혹은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유럽과 중국을 알고만 있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단순히 교양이나 지식의 부족보다는 편견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러 가지 다양한 요소들이 혼합되어서 하나의 틀 안에 묶여져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단지 거대한 덩어리 하나로만 애매모호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라고 하는 단위로 이해하면 이와 같은 편견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도시가 국가보다는 작은 단위라 할지라도, 그 작은 단위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각 도시가 가진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이해해나감으로써 도시라는 일상적 삶의 공간을 영위하는 사람의 시각에서 국가라는 대상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은 각각 중국의 25개 도시 (시안, 난징, 뤄양, 베이징, 항저우, 지난, 하얼빈, 창춘, 우한, 창사, 톈진, 광저우, 충칭, 선양, 구이린, 하이커우, 홍콩, 상하이, 선전, 다롄, 청두, 우루무치, 라싸, 쿤밍, 타이베이), 그리고 유럽의 18개 도시 (로마, 파리, 베를린, 빈, 바르샤바, 부다페스트, 런던, 아테네, 스톡홀름, 브뤼셀, 프랑크푸르트, 스트라스부르, 베르됭, 헤이그, 제네바, 바이마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통해서 중국과 유럽을 보다 통합적인 관점에서 ‘문명’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일단 유럽이든 중국이든 단순한 몇 개의 단어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커다란 줄기를 공유하면서 여러 가지 역사의 양상들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이는 문명이다. 파리나 런던 한 두 도시가 유럽을 나타내지도 않고, 북경이나 상해가 중국의 진면목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국가라는 개념 이전에 문명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문명을 가능하게 한 네트워크를 만든 도시 하나하나를 보아야지 대상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하와 장강, 남방과 북방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와 다양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아시아 문명으로써의 중국, 알프스 이북과 이남, 기독교라는 키워드와 지역적 색채들로 이루어진 서구 문명인 유럽. 이 문명을 이룬 각 도시들과 도시를 만든 원동력과 도시라는 대상을 실제로 영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문명을 재조명하는 점이 흥미롭다. 문명이 단지 거창하고 거대한 추상적 용어가 아니라, 정말로 인간의 실제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정보화 물결로 인해 지구촌이라는 말이 보편화되고 ‘탈근대’가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국가’라고 하는 근대의 발명품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국경이 꼭 구성원들의 문화와 정신의 국경과 일치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현재는 도시라고 하는 비교적 작은 카테고리 안에 다양한 구성요소가 모이면서 또 다른 새로움을 창조하는 시대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서울은 대한민국 전체를 대변하지 않고, 북경이나 도쿄가 중국과 일본이라는 국가 전체를 나타내지 않으며, 유럽의 수많은 도시들은 그들이 속한 국가와는 별개로 각각의 독립적인 행동을 통해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다. 위의 두 책들은 국가나 국경 단위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도시라고 하는 대상을 통해서 분석하고 있으며, 나아가 도시라는 삶의 공간을 통해 현재 우리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런 면에서 한 번 쯤은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자세한 리뷰는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