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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利 : 생각하다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를 생각하며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서양 중세사와 문화사 연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보았으리라고 생각한다. 1929년 뤼시앙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에 의해 창시되어 프랑스 학계를 넘어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아날학파의 마지막 생존 멤버이던 자크 르 고프, 그가 지난 4월 1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다. 이는 비단 가까운 친지나 친구들의 죽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생전 얼굴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이기도 한데, 가령 너무나 좋아하던 스타나 작가가 죽는 것 역시 슬픔에 있어서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르 고프 선생님께서 천수를 누리다 편안히 가셨다는 점이다.

 

 학부에서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르 고프 선생님의 책을 접했고, 또 이 분그 때 당시 살아계시던 아날 학파의 마지막 멤버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그래도 내가 살아서 책에 르 고프 선생님의 사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비록 가능성 없는 소망이 할지라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자각하는 것은 꽤 차이가 크다.

 

 어쨌든 이번 글을 르 고프 선생님을 다시 생각하며, 그의 역사적 회고록은 “중세를 찾아서”라는 책을 읽고 쓴 글이다. 원래 예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이지만 그의 부고를 듣고 나서 왠지 다시 읽고 싶어져서 손에 잡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어려운 용어만 나열 된 중세사 개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까 오히려 중세사 연구의 대가가 그의 삶 막바지를 앞두고 그의 연구 여정을 가장 쉽고 대중적인 언어로 총 정리한 책이라는 인상이 든다. 특히 종교와 황제, 전쟁 등 정치적인 주제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의 중세사 서적들과는 달리 중세인들의 심성과 중세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대해 포커스를 두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지극히 대중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연구하고자 한 주제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중점을 두고 연구한 세부 테마들을 현대인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원래 아날학파의 설립 목적은 자료의 폭 좁은 해석과 사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한 랑케를 비롯한 근대 실증주의 역사학을 비판하고, 지리학, 철학, 인류학 등 다양한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종합하여 새로운 역사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자크 르 고프는 아날학파의 3세대 학자로, 페르낭 브로델로 대표되는 2세대 학자들이 주로 전체적인 사회 및 경제 구조에 중점을 둔 데에 반해 ‘역사인류학(l'anthropologie historique/ Historical anthropology)’로 대표되는 3세대 학자들은 심성, 미신, 관습, 풍속 등 보다 미시적이면서 일상적인 주제로 역사학의 방향을 이끌어냈다. 아마도 이들 제 3세대의 가장 큰 공은 기존 역사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미시적인 주제들을 역사학의 영역으로 가져와 학문 분야를 대중화시켰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대학에서 상아탑으로만 머물러 있는 학문의 영역을 대중들에게 보급함으로써 관심을 고취시키고, 새로운 연구 영역의 장과 비전 제시를 이룩한 것이다.

 

 <중세를 찾아서(A la recherche du Moyen Age)>는 르 고프의 학문적 여정과 목적을 간결하게 설명해준 책으로, 보다 다양한 주제와 시각을 통해 중세사를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책은 기존의 저서들과는 달리 프랑스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장 모리스 몽트르미(Jean-Maurice de Montremy)와 르 고프의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기존의 저서들 보다 더 간결하게 테마별로 카테고리 화 되어있어 읽기가 훨씬 편하고, 나아가 둘의 대담 내용을 통해 르 고프가 프랑스 및 유럽 전체에 미친 ‘역사 대중화’의 공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이 흥미를 끄는 점은 바로 둘의 연구 주제가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가히 혁신적이라 할 만 하다. 가령 예를 들어 르 고프는 중세말 십자군 운동의 기원과 정신적 근원에 대한 물음에 기존과는 다른 답을 제시한다. 비록 대부분이 문맹인 사회인지라 보통의 ‘젊은이들’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기사’라는 특정한 계급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을 통해서 십자군 운동의 하부 원동력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인구의 증가로 인해 이들이 봉토도 아내도 얻을 수 없었고, 또 이미 팽창된 성직계에 들어가 자리를 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십자군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십자군 운동은 단순한 정치적·종교적 운동으로만 본 기존의 시각과는 달리, 정치 및 종교의 팽창 야심을 실체화 할 수 있는 대다수 구성원들의 ‘심성’에 초점을 맞춰 보다 많은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어느 시대이던지 간에 경제적 기반을 잃고 결혼도 못한 채 방황하는 홀아비들의 불만은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주요 위협 요인이 되지 않던가. 마치 지금의 한국 사회처럼.

 

 이외에도 여러 가지 흥미로운 화두가 있는 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시간’과 ‘연대기’에 관한 개념이다. 중세에는 <1000년>이라는 시간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물리적인 햇수로써의 천년이 아니라 종교적 관념으로써 그들의 현재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일종의 우주적 시간이었다. 따라서 중세적 시간과 현재의 시간은 엄연히 달랐기에 세계를 보는 시각과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역시 달랐고, 이로 인해 일반 민중들이 영위하는 삶 역시 현대인의 그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단순한 정치적 사건과 사료의 연대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삶’이라는 보다 미시적이고 구체적이며 일상적인 주제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연구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농경사회의 수많은 문맹 농부들, 그리고 도시의 각종 노동자 및 상공업 계층을 비롯한 ‘일반적인 사람들’을 역사 연구의 전면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사실 왕족이나 귀족, 기사, 군인이 아닌 사람들은 사료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 연구의 대상에서는 쭉 제외되어 왔었고, 오히려 이들은 미시사와 구술사 위주의 ‘인류학(l'anthropologie)’ 혹은 ‘민족지학(l'ethnographie)’에서 주로 다루는 연구 대상이었다. 아날학파의 3세대인 르 고프는 과감하게 이 ‘민중적 학문’을 역사학으로 끌고 와 역사 연구의 영역을 넓히고, 또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들을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역사를 대중의 화젯거리에 올려놓았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역사학이 대중화 되고 연구가 활기를 띤 데에는 그의 공이 단연 크다.

 

 한 때 내 학부 시절의 롤 모델이자 로망이었고, 또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학자 중 하나인 선생님이 세상을 뜨셨다고 하니 허전하다. 이제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는다. 허나 사람의 삶은 한 순간이지만, 훌륭한 학자가 남긴 저서는 영원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학자는 그의 저술을 남긴다. 비록 르 고프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그가 남긴 저작은 영원히 중세사를, 그리고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모든 후학들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가이드라인 이자 등불이 될 것이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Je vous présente toutes mes condoléa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