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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利 : 생각하다

우크라이나, 동서문화 단층선의 필연적 비극

 최근 뉴스에서 알 수 있다시피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점점 극에 달하고 있다. 과도정부와 반군의 대립이 점점 첨예해지고 있으며, 이미 우크라이나는 ‘내전’에 돌입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 벌어진 말레이시아 항공 항공기 격추와 같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일 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분노를 자아내면서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서방 유럽의 끝이자 러시아의 시작이라 불리는 나라, 우크라이나. 어째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일까?

 

 

 

 

 일단 우크라이나의 위치를 보면 '유럽과 러시아, 동서가 만나는 단층선'에 위치해있음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라는 국명 역시 '변방'을 뜻하는 라틴어 '크라이'에서 유래되었다. 우크라이나가 당시 로마제국의 변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문제, 그리고 과거의 우크라이나 겪었던 격동의 역사 역시 이 같은 지리적 위치와 긴밀하게 연관 되어있다. 그럼 우선, 현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크라이나인들의 '본가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도록 한다.

 동유럽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민족인 슬라브족은 크게 서슬라브(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남슬라브(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 그리고 동슬라브(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로 나눠지는데, 이 중 동슬라브족의 첫 국가가 탄생한 곳이 우크라이나 키예프이다. 로마인도 아니고, 게르만인도 아니던 동유럽의 원주민 슬라브족들은 스스로를 '루시'라 부르며 키예프를 수도로 정하고 9세기에 통일왕국을 건립한다. 이 후 비잔틴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종교 역시 비잔틴의 종교이던 그리스정교로 개종하고, 비잔틴 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본격적인 역사 무대에 들어선다. 심지어 블라디미르 대공은 비잔틴 황녀와 결혼하여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기도 한다.

 이 같은 이유로 우크라이나가 지금도 스스로 '동슬라브의 발상지'를 내세우며 '슬라브 본가'를 자처하는 것이다. 모스크바가 있기 이전에 키예프가 있었기에 지금의 슬라브가 존재하고, 따라서 슬라브의 발상지인 그들이 진정한 슬라브의 본가이자 맹주라는 의식이다. 그러나 키예프의 영광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인해 막을 내리게 된다. 징스칸의 손자이던 바투의 유럽원정으로 인해 키예프는 철저히 짓밟히고, 그곳엔 크림한국과 킵차크한국이 세워진다. 이 때 몽골에게 협력한 타타르인들이 대거 이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지배계층을 이루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선 ‘몽골’과 ‘타타르’를 착각하고, 나아가 이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묘사하는 풍조가 아직도 남아있다.

 

 

 

 몽골의 침입으로 키예프 루시의 중심이던 드네프르 강 유역은 완전히 무너지고 황폐화된다. 반면 르비프(Lviv)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서부의 갈리치아 유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에 편입되어 몽골 침입 이후에도 계속 번영을 누리게 된다. 서부의 우크라이나인 집단은 이 무렵까지도 키예프 루시라는 의식을 가지고 러시아인도, 벨라루스인도 아닌 독자적 민족을 형성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유럽의 영향을 받으면서 서방 세계에 가까운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그들은 폴란드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인 동방정교를 고집하고 폴란드인 지주의 진출에 저항하였다. 동부의 우크라이나인 집단이 모스크바와 연합하여 몽골에 저항하면서 ‘러시아’라는 동질의식을 키워나간 것과는 사뭇 대비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동부와 서부의 차이는 훗날 우크라이나의 분열과 갈등의 정신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동서가 서로 다른 정체적 세력 하에 들어간 것이,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동서를 가르는 이질성을 잉태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동부에서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대대적인 반 몽골 투쟁이 일어나는데, 이 투쟁은 신흥 세력인 모스크바 대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슬라브족은 모스크바 대공을 구심점으로 새로 결집하여 몽골에 대항하고, 마침내 명장인 유리 돌고루키가 몽고군을 격퇴하여 킵차크한국과 크림한국을 무너뜨린다. 이 일을 계기로 모스크바 대공은 슬라브 세계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잡는다. 이어서 모스크바가 슬라브의 새로운 수도로 정해지고, 크렘린 궁전이 건설되고,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구스 드라가세스의 질녀인 소피아와 결혼하여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로 자처함으로써 키예프는 완전히 모스크바에게 밀려난다.

 이후부터의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기나긴 착취와 수탈의 역사이다. 아시다시피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흑토(체르노젬)이라는 천혜의 조건을 지닌 농경국가인데, 얼마나 이 땅이 풍요로웠으면 유럽 속담에 ‘서쪽엔 프랑스, 동쪽엔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빵 바구니’라 불리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 같은 천혜의 자연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있어선 전혀 축복이 아니었다. 풍부한 농작물은 왕조에 수탈당하고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앙정부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반감의 기원이 된다. 특히 폴란드에서 러시아로 편입된 서부 우크라이나의 경우는 그 반감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코사크를 중심으로 하는 우크라이나의 자치권을 인정하던 제정 러시아는 차차 자치권을 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코사크 간부에 대한 귀족 특권의 부여, 농노제의 도입 등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억압을 강화해나갔다. 우크라이나는 ‘카자흐’라 불리는 떠돌이 농민 집단들의 집합소가 되고,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심리적인 반발심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것이 폭발해서 17세기 후반 우크라이나 돈강 유역에서 벌어져 러시아 전역을 휩쓴 농민반란 ‘스텐카 라진의 난’이다. 이후 우크라이나의 카자흐들과 농노들은 더욱 거세게 정부에 저항하고, 민족 시인이라 불리는 타라스 셰브첸코와 소설가 솔로호프의 목소리를 통해 우크라이나는 민족의식각성의 시대를 맞는다. 그리고 마침내 1917년, 절대적으로 보이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빈곤한 농민층이던 우크라이나는 사회주의 정부를 지지한다. 이제 과거의 착취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 우크라이나는 사회주의의 발흥과 동시에 너그러운 민족정책으로 인한 민족문화의 르네상스를 맞기도 한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이러한 희망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스탈린의 가혹한 민족차별정책은 제정 러시아의 착취 이상으로 우크라이나에 큰 상흔을 남긴다.

 사실 스탈린은 볼셰비키 공산당 내에서 '소수민족문제 전문가'로 꼽히는 사람이었는데....그는 철저하게 러시아인과 비 러시아인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고수한다. 특히 각 지역 간의 갈등과 지역감정, 민족문제 등을 기가 막히게 잘 이용했는데, 이는 소련연방으로써 우크라이나를 통치할 때도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동서가 지닌 이질성과 서로에게 느끼는 반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소비에트 일당 체제를 강화할 줄도 알았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쪽 크림반도에 러시아인들을 이주시키고 대거 특혜를 준다.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수인 서부는 동부와 크림반도의 특혜에 비해 점점 소득과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해간다. 실제 스탈린의 농업정책은 최악의 실패였던지라 이 곡창지대에서 수천만이 비정상적으로 아사한다. 게다가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본 것도 역시 서부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스탈린과 동부에 대한 반감은 점점 더 심해지게 된다. 여담이지만 고려인(까레이스끼)들을 강제 이주시킨 장본인도 스탈린인데, 정작 스탈린 본인도 소수민족이었단 것은 아이러니이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쥬가슈빌리,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루지야 출신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 차별로 인한 갈등은,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본격화하게 된다. 오랫동안 러시아와 동질의식을 가지고 있던 동부와 친유럽적 정서를 지닌 서부가 가진 이질성으로 인해 신생국 우크라이나는 친 서방 노선과 친 러시아 노선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독립 이후에도 대권을 잡은 것은 러시아계가 대다수인 동쪽을 대표하는 당이었기에 갈등의 씨앗 역시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2004년, 이때는 당시 대통령이던 쿠치마의 실정으로 인해 전 국민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그리고 대선에서 동쪽을 대표하는 여당후보 야누코비치와 서쪽을 대표하는 야당후보 유시첸코가 박빙으로 맞붙게 된다. 간발의 차이로 동쪽을 대표하는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지만, 부정선거증거가 포착되면서 전혀 다른 국면으로 돌입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어서 서부를 중심으로 부정선거규탄과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야당의 상징색인 오렌지색을 입고 거리로 나오는데, 이것이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한 '오렌지 혁명'이다. 오렌지 혁명은 구 소련 국가들이 과거의 권위주의 체제를 벗고 민주주의로 나가는 시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재평가의 계기를 제공했으며,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기타 CIS 국가의 민주화 요구에도 불을 지피는 불씨 역할을 하였다.

 

 

▲오렌지 혁명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빅토르 유시첸코(좌), '

가스공주'라 불리며 성공한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율리아 티모셴코(우)

 

 오렌지 혁명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는 최초로 권위주의가 아닌 민주적인 선거를 통한 정부를 수립된다. 이 선거를 통해 서부를 대표하는 미남 아이콘이던 인기 정치인 유시첸코가 대통령이 되고, 그 유명한 율리아 티모셴코가 총리로 취임한다. 허나 이들의 개혁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이 둘 역시 다른 우크라이나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쟁과 비리에 휘말려 결국 총선에서 패하고 검찰신세를 지게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선거는 다시 기존 여당으로 기울어지고 2013년 야누코비치가 집권하는데, 문제는 야누코비치의 노골적인 친 러시아 정책이 서부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특히 야누코비치가 옛 소련 공동체에 가입하려한 것이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반발은 점점 거세지면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이어지는데....2014년 2월,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던 야누코비치 정부가 시위군에게 발포를 허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반정부 시위는 내전으로 격화된다. 그리고 거센 반발에 못이긴 야누코비치는 탄핵당하고 러시아 망명하고, 야권인사들이 키예프에 입성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하는데 서부 출신이 대다수인 야권인사들이 키예프의 승기를 잡자 이제는 러시아계가 대다수인 동부와 남부 크림반도에서 다시 이에 반발하여 독립하겠다고 다시 반정부 시위를 하는 것이 지금 우크라이나의 상황이다. 그러나 말이 시위지 규모나 양상이나 내전이나 다름없는 것이 현실이다.

 네덜란드 출발 말레이시아 항공기 격추된 사건에서 보이다시피, 동부의 반군들은 그 큰 항공기가 단번에 격추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미사일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웬만한 군대 뺨치는 화력과 무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특허 있는 강력한 무기들을.

 러시아는 관계없다고 발뺌하고 있지만, 그 미사일은 미국도 못 다루는 미사일이다. 오직 러시아만이 가지고 있고, 제대로 취급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미사일이다. 이는 곧 러시아가 동부와 남부의 반군들을 지원해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더 기가 막히는 사실을 하나 추가해보도록 할까? 러시아 마피아들은 구소련이 무너지고 공기업들이 대거 민영화 될 때 이를 싸게 매입해서 유전, 탱크, 미사일, 핵무기 등의 엄청난 무기와 자원을 지니고 있는데, 지금 반군 뒤에는 이런 마피아들도 꽤 있다. 심지어 이들은 신무기입수의 달인들이다.

 자, 그렇다면 러시아가 왜 그렇게 크림 반도에 목매는 지 한마디로 요약해보자. 그건 '부동항(겨울에 얼지 않는 항)'이니까 그런 것이다. 사실 러시아 입장에서는 겨울에 얼지 않고 해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항구가 절실한데, 이게 얼마 없기 때문에 크림반도 획득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가 크림반도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물론 목적은 전부 다 부동항 획득. 제정 러시아가 1853년에 오스만 제국령 크림반도에서 그 난리를 안 일으켰다면 그 유명한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독립과 발트3국 독립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 외의 부동항을 다 잃었고, 지금이 그 중 하나인 크림반도를 되찾을 기회인데 러시아가 이를 그냥 보고만 있을까. 천만의 말씀.

 사실 EU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통해 흑해를 장악하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무서운 일인데, 그렇다고 이를 마구 견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면 우크라이나의 송유관을 통해 러시아의 가스가 들어오기 때문에 러시아의 비위를 건드리면 그날로 서방세계에는 에너지 대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인접국인 핀란드, 폴란드, 헝가리 같은 국가들은 러시아가 가스관 잠그는 순간 에너지 대란은 시간문제이다. 그래서 EU와 미국도 지금 굉장히 조심스럽게 나서고 있는 것이고,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 분열은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한국의 남북분단을 확정지은 회담이 열린 얄타에서 크림반도의 분리 독립 찬반 주민투표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래서 역사는 모르는 것이요 미래는 함부로 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나 싶기도 한다. 씁쓸한 상황이다.

 일찍이 사무엘 헌팅턴은 우크라이나를 두고 '유럽과 러시아의 단층선'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지금 그의 말처럼 동서가 만나는 유럽의 끝에서, 서방과 러시아의 첨예한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희생자는 점점 늘어만 가는데 내전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뿌리 깊은 갈등들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겠다만....말레이시아 항공기 격추 사건처럼 무고한 민간인들이 자꾸 희생되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부디 조속히 해결되었으면 하지만,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사안이다. 과연 서방과 러시아라는 두 이질적인 세계는 화해할 수 있을까? 21세기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드는 문화와 민족의 갈등은 어디까지 퍼져나갈까?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니 정녕 동과 서, 그리고 이질적인 문화와 정서는 양립이 불가능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씁씁함을 감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