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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 : 살다/彿國記

Trocadéro, 회색의 파리







 파리 생활 6개월 차에 접어든, 그리고 이제는 거주 허가까지 완료되어 체류증 까지 지닌 어엿한 파리지엔느 이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안 가본 ‘유명한’ 장소가 있었다. 바로 트로카데로(Trocadéro) 광장! 파리 만국박람회 때 전시관으로 쓰이던 샤이요 궁 북서쪽에 있는 반원형의 광장인데, 정확한 이름은 ‘트로카데로 11월 11일 광장’이다. 트로카데로라는 이름은 1823년 나폴레옹 군이 성공적으로 함락시킨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지방의 요새 이름이다. 트로카데로 요새 함락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1827년 이 광장의 이름으로써 트로카데로를 선사한 것이다. 이후 제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이를 기리기 위해 종전 날짜인 11월 11일을 광장 이름에 붙여서 지금의 이름인 ‘트로카데로 11월 11일’이 되었다.





 트로카데로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꼽히는 곳이다. 일단 평지인 파리에서 그나마 높은 언덕에 있는 광장인지라 전경이 꽤 멋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은, 에펠탑을 정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각도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튈르리 정원이나 센 강 주변에서도 에펠탑을 볼 수 있지만 평지에서 너무 가까이 보는 에펠탑은 생각만큼 예쁘기는커녕 다소 그로테스크한 철골 구조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반면 트로카데로에서 보는 에펠탑은 전체적인 실루엣이 다 드러날 뿐 아니라, 약간의 거리를 두고 파리 중심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환상속의 파리 그 자체이다. 아마 파리에 대한 환상과 ‘파리 신드롬’을 만들어낸 수많은 이미지들이 바로 이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난 파리에 올 때 아무런 기대도 하고 오지 않았다. 한번 쯤 루브르에 가서 보고 싶었던 유물들을 신나게 보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패션 화보나 유명인들의 사진에 그렇게나 많이 등장하는 에펠탑과 샹젤리제, 방돔 등에 대한 환상은 전혀 가지지도 않았다. 패션의 도시이자 문화와 낭만의 도시인 파리의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사진 대부분이 바로 이 트로카데로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그러나 정말로 파리에 대해 기대는커녕 걱정만 가득했던지라 파리에서 몇 달을 머물면서도 이곳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학위가 끝나기 전에 한 번쯤은 올 텐데 굳이 애써 서두를 필요 없다는 생각도 했고.


 그러다가 휴일 며칠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서 논문 구상만 하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나왔다. 오후 3시.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지하철에 몸을 실은 내 발길이 닿은 곳은 6호선 거의 끝자락에 위치한 트로카데로 광장이었다. 비는 오지 않아도 구름이 가득 낀 잿빛의 날씨였지만 역시 사람이 많았고, 역시 대부분은 관광객과 커플이었다. 이곳에서는 모두 환하게 웃으며 에펠탑을 바라보고 지금의 순간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에펠탑이 나오게, 최대한 웃으며, 가능한 예쁘게 나오도록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이 시간과 연인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나 아름답다고 기억하는 파리, 혹은 그렇게 느끼는 파리와 실제의 파리는 다르다. 나에게 파리는 생활의 공간이고, 내가 헤쳐 나가야 할 문제가 산적한 공간이다. 허나 아무려면 어떠랴. 때로는 저런 감상 사이에 살짝 껴서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는 것도 필요하리라. 인간이란 한계에 이르는 도전을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현실의 틈 사이에 낀 모르핀을 발견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다음번에 트로카데로에 올 때는 맑은 하늘과 편안한 육신이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